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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Dec 03. 2021

양 사장님, 친하게 지냅시다

나도 사람을 잘못 볼 때가 있구나

영화배우 한석규 씨가 한때 '흥행 보증수표'라는 칭호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한때는 '인간 보증수표'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적어도 내가 어울리는 사람들만큼은 꽤 괜찮은 사람임이 간접적으로 증명된다는 뜻이다.


그런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크게 봐서 정확히 두 번인데 그중 두 번째가 우리 가게 옆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양 사장 사모님이었다. 시골에서 갓 상경한 듯한 순박한 외모에 수수한 옷차림의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남편 잘못 만나 고생만 하는 비운의 중년 여성처럼 보였다.


반면 그녀와 함께 사는 양 사장은 한마디로 한량이다. 가급적이면 쓰고 싶지 않은 단어지만 딱히 다른 표현을 할 수 없을 만큼 정확히 '양아치'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날씨가 좋으면 사람들과 어울려 바다낚시를 가고 궂은날이면 장사를 일찍 접고 지인들과 도박판을 벌이는 등 일을 해서 돈을 벌 생각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 눈에는 남자 잘못 만나 고생만 하는 사모님이 그저 불쌍하게만 보였다.



코로나 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우리 가게는  '누가누가 더 장사 안되나'에 대해 돌아가면서 열변을 토하는 인근 자영업자들의 하소연 경연장이 되었다. 그날은 양 사장 차례였다.


"여기는 그래도 손님들 좀 있지예? 마 우리는 죽겠습니더. 오늘도 저녁 내내 테이블 3개 돌리다가 마무리하고 혼자 술 마시다가 이제 퇴근하는 길이라예."

이젠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은 사장님들의 하소연이라 그래도 버텨야지 어떡하겠냐고 우리도 장사 안 되는 건 마찬가지라며 지극히 기계적인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게 누가 낚시 다니고 도박 하래?)


넋두리는 그만 하고 어서 가줬으면 하는 내 바람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양 사장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윽고 한참의 앓는 소리 끝에 양 사장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그나마 착한 건물주를 만나서 1년간 임대료 면제받아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믄 큰일 날 뻔했다 아임미꺼."


"우와~~ 말로만 듣던 착한 건물주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군요. 복 받으셨네요"

쓰린 속을 달래며 마음과는 사뭇 다른 대답을 하는 내게 양 사장은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그 건물주가 우리 장인이거든예."

순간 얼마나 놀랬던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그 양반이 왜 그리 천하태평인지 알 수가 있었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을 하며 살았건만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남편 잘못 만나 고생만 하는 비운의 여성이 건물주의 딸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퇴근 후 아내에게 새벽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며 물어보았다.

"당신, 그거 알아? 우리 가게 앞에 그 술집 사장 있잖아. 건물주 사위라던데."

"왠지..... 그 아줌마 돈 좀 있겠다 싶었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눈엔 시골 아줌마처럼 보이더만."

"그 아줌마 몸에 두르고 다니는 걸 봐라. 목걸이하고 반지, 팔찌 다 하면 적어도 몇 백은 나올 걸? 그거 전부 24K 같던데. 아이고 부럽네 부러워."

여자들 눈에는 그런 것만 보이는 것인지 자세히도 봤다 싶었다. 말이 길어지면 신세 한탄으로 흐를 게 분명해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러지 말고 당신 말이야. 이제까지 비밀로 한 거 용서해줄 테니 솔직히 말해봐. 혹시 나 몰래 숨겨놓은 땅이라든가 물려받은 땅 같은 거 없어? 있으면 시세라도 좀 알아보자."

"이 인간이 미쳤나? 내가 그런 땅이 있으면 니 같은 놈 시중들면서 같이 살고 있겠나?"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이고 말았다.


며칠 후 그 비운의 여성, 아니 건물주의 따님께선 아들과 함께 과자를 사러 오셨다. 아내의 말은 정확했다.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수많은 금붙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비슷한 옷차림에 같은 사람인데 갑자기 사람이 다르게 보였다. 그동안 나는 왜 몰랐을까? 선입견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아무래도 나는 보증 수표가 아닌 부도 수표였던 것 같다.

하긴, 착하고 단아하고 순수할 것만 같았던 아내가 '사자후'를 내뱉는 여전사임을 몰라 봤던 첫 번째 실수도 있었으니 부도 수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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