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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Dec 04. 2021

이러다가 애 잡겠네

관리형 아내 vs 자율형 남편

"아무리 봐도 당신은 공무원 할 사람 같지가 않은데 어떻게 그런 걸 할 생각을 했대?"

"등 떠밀려서."

"그게 뭔 말 이래?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내는 집요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한도 끝도 없는데,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인문계랑 자연계 선택할 때 테스트 결과 인문계 99가 나오고 자연계 97이 나왔었어. 단지 2점이 높다는 이유로 부모님과 선생님 모두 인문계로 몰아붙인 거야. 당시엔 자연계 쪽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던 시절이라 어느 정도 비율을 맞춰야 하니 일종의 희생양 같은 게 필요했을 수도 있고."

"말도 안 돼."


"그 뒤는 더 가관이지. 두 아들을 공대로 보냈으니 마지막 남은 하나는 어떻게든 글로 먹고사는 사람을 만들고 싶으셨던 거야. 부모님 두 분이 날 설득할 때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넌 글씨를 잘 쓰니 공무원을 해야 된다.'라고 하셨어. 그 당시엔 공무원이나 금융업계 등등 모두 수기(手記)로 서류를 작성하던 시기였으니 전혀 엉뚱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지금 기준에선 말이 안 되는 게 맞긴 하네."

내 얘기에 아내는 실소를 터뜨렸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음악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대작이라 생각하는 <넥스트>의 "껍질의 파괴"라는 노래 도입부 가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부모가 정해놓은 길을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친구들과 경쟁하며 걷는다.
각본대로 짜여 있는 뻔한 인생의 결론 향해 생각 없이 발걸음만 옮긴다.


빼고 보탬 하나 없이 이 노래 가사처럼 살았고 지나고 나서야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을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살아온 나였기에 당연히 딸아이에게만큼은 어느 정도 자율과 선택권을 보장해주고 싶었다. 본인 스스로 하고 싶은 게 있고 그 방면에 재능이 있다면 그게 어떤 길이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인데 불행히도 아직까지는 그게 뭔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내도 이런 큰 틀에서는 동의를 하지만 세부적인 방법론에 있어서는 견해차가 큰 편이다. 하긴, 함께 살아오면서 뭐 하나 충돌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으니 자녀 교육관이라고 맞을 턱이 있겠나. 아마도 자라온 환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내가 강력한 부모님의 의지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인 것과는 달리 아내는 어린 시절부터 방목에 가깝게 살았으니 부모의 관심은 필수라는 생각을 그 누구보다 강하게 가진 게 분명하다.


그나마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내 입김이 조금 세게 작용을 해서인지 딸아이는 피아노 외에는 다른 학원을 다니지 않았고 조기 교육이란 명목 하에 영어와 수학, 논술학원 등을 다니는 여느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당시에도 아내는 하루라도 일찍 학원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을 했으나 그때마다 '공부도 일종의 특기이고 공부할 아이들은 따로 정해져 있다' 확고한  소신에 아내의 의견은 번번이 좌절되었었다.


그렇게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던 중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주변 아이들이 주말까지 학원을 다니는 모습에 아내는 위기감을 느꼈고 덩달아 딸아이도 영어와 수학 학원을 보내달라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재미 삼아 영어 학원을 잠시 다니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입시 위주 교육에 발을 들이겠다고 딸아이가 선언을 해버렸으니 아내는 반가운 마음에 입이 찢어졌고 나는 망연자실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공부하는 기계'로는 만들지 않겠다  번이고 다짐을 했는데 하루아침에 그게 무너져 버렸다.


아이 스스로 선택을 한 것이니 반대를 할 뚜렷한 명분도 없고 그렇다고 강제로 막으려니 훗날 나를 향해 원망의 소리를 내뱉을까 그것도 두렵고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아이는 요즘 아침 8시에 학교에 가서 밤 9시가 되어야 집에 들어온다. 요일별로 편차가 조금 있지만 한밤중에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인데 과연 이게 정상적인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책을 읽으며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기본을 다졌으면 하는 바람인데 그게 그리 큰 욕심인 것인지......


'딸, 넌 그래도 아빠 잘 만난 줄 알아. 그나마 내가 막아서 주말엔 휴식이라도 하지 네 엄마 같은 아빠 뒀으면 너는 일주일 내내 학원행이야. 게다가 단지 글씨 이쁘다는 이유로 공무원 시험장에 강제로 밀어 넣는 일은 없을 테니 얼마나 행복해? 그러니 제발 집에 있을 때 책 좀 읽자.'


오늘따라 아들의 초중고 과정을 대안 학교에서 마친 친구 부부가 왜 이리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행여 내 글씨를 궁금해하실 독자님들을 배려하여 아래에 공개하는 바이다.

아내가 유일하게 인정하고 칭찬하는 내 손글씨, 아내는 자기가 써놓고도 자기가 읽지 못하는 악필이다

메인 사진 출처 : Gaelle Marcel i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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