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 연합군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날
아내는 겉과 속이 똑같다. 마음속에 뭔가를 담아두는 법이 없다. 웬만한 건 속으로 삼키고 견디는 내 성격과는 정반대다. 모르긴 해도 살면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나와는 달리 적어도 아내는 화병이란 것은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아내는 막말을 잘한다. 물론 나도 막말을 하긴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내는 무의식 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고 나는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똑같지 않냐고 말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해야 할 때와 해서는 안될 때를 구분한다는 뜻이다.
작년 이 맘 때쯤 아내와 같이 어떤 프로그램을 보는데 일반인 출연자 중 한 명이 모 가수의 팬이라며 곧 있을 자기 결혼식에 축가를 불러주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 가수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수락을 했고 실제로 약속을 지켰다. 그런 훈훈한 장면을 보고도 취미가 '막말'이고 특기가 '상처주기'인 아내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그 불똥은 결국 나에게까지 튀었다.
"이야~~ 세상에 저 얼굴도 결혼을 하는........"
(말끝을 흐리다가 흘낏 나를 쳐다보며)
"하긴 이 얼굴도 했는데 뭘...."
"뭐라고? 이 사람아. 내가 이래 봬도 어릴 적에 유괴당할까 봐 걱정했을 정도의 얼굴이야. 험난한 청소년기를 겪은 후 급격히 퇴보를 해서 이 모양이지. 지난번에 어머니 말씀하시는 거 못 들었어? 골목에 나가 놀고 있으면 지나가는 행인들이 '아이고, 얘는 뉘 집 애길래 잘 생기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사람 눈길을 확 끌어 들이노.'라고 했다잖아."
가만히 듣고 있던 딸아이가 한마디 거든다.
"아빠,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 핵심은 '잘 생기지도 않았는데'야. 제발 인정할 건 인정해. 억지로 우긴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아....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것인가. 평소에는 머리 잡아채고 싸울 듯이 으르렁거리는 두 여자가 이럴 땐 또 기가 막히게 단합이 잘 된다.
장난이고 농담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딸아이가 어릴 때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하이고, 우리 아가씨는 아빠를 안 닮아 정말 다행이네.", "엄마 닮아서 정말 예쁘게 생겼구나."라는 말을 들을 때면 흐뭇하면서도 뭔가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2년 전쯤 페이스북에서 인연을 맺은 누님이 한 분 계신다. 출신학교도 같고 학교를 다니던 시기도 겹쳐서 친해진 그 누님께서 혹시 남양주에 올 일 있으면 얼굴 한 번 보자고 하신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누님, 제가 관상용 비주얼이 아닌지라 선뜻 약속은 못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이 나이 먹고 무슨 얼굴을 따지고 그러냐며 괜찮다고 하셨다.
당시에는 그냥 알겠노라 말씀드리고 말았는데 이 글을 통해 그때 차마 못 썼던 답글을 대신해야겠다. '저기.... 누님, 저랑 같이 사는 분께서 저보고 못 생겼다고 얼굴 마주 볼 상대방 눈도 좀 생각하라는데요?'
미국에 사는 지인 한 분은 그런 말씀도 하셨다. "저도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 사람들 정말 이해가 안 가요. 왜 다들 연예인 외모에 기준을 맞추는 건지. 아르웬님 여기 오시면 지극히 정상이고 평범한 사람 정도밖에 안돼요. 결코 뚱뚱한 편도 아니에요. 진짜 이 동네 사람들 어떤 모습인지 사진 찍어서 보내주고 싶네요."
다들 좋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큰 위로는 되지 못했다. 내겐 여전히 극복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외모 콤플렉스다. 나이를 먹으면 좀 나아질 줄 알았더니 오히려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고 사람 만나기가 두려울 때도 있다.
'이봐 당신!!! 당신 눈에는 내가 이렇게 보이지??'
'내 눈에 당신은 이렇게 보여. 떨어지는 비도 나보다 늦게 맞고 윗 공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말이 많아!!'
한바탕 소동이 진정된 후 아내와 딸을 붙잡고 얘기했다.
"당신 제발 말 좀 가려서 해. 나한테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는데 밖에 나가선 절대 그러지 마. 당신 어디 나가서 말실수할까 봐 내가 조마조마해서 못 살겠어. 성질 더러운 손님 만나면 당신 뺨 맞을 수도 있어."
"그리고 딸, 너 말이야. 나도 중학교 졸업할 때까진 비교적 멀쩡한 얼굴이었거든. 너도 고등학교 갈 때쯤 되면 아마 나처럼 역변이 시작될 것이야. 그때 가서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는가 한 번 두고 보자."
그 말을 들은 두 여자는 길길이 날뛰었다.
"아니, 이 아저씨가 딸 혼사길 막을 일 있나 말을 해도 뭘 그렇게 하고 그래?"
"혼사길을 막다니? 당신이 말하는 그 못 생긴 놈한테 목매고 쫓아다닌 정신 나간 여자도 있는데 뭘. 당신처럼 미친놈이 적어도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강력한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통쾌했다.
누가 뭐래도 그날의 승자는 나였다.
그 후, 거실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