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혹시 돈 주고 면허 딴 거 아냐?
첫 데이트를 하던 날로 기억한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만남에 지금의 아내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었다.
"집에 가서 밥 먹고 갈래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했던 대사가 생각나는 그 한마디 말에 난생처음 여자가 사는 집에 들어갔다.
진수성찬이라 할 수는 없지만 정갈하게 차려진 몇 가지 반찬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이런 여자라면 남은 인생을 걸어도 되지 않을까? 게다가 영양사, 한식 조리사, 양식 조리사 3개의 면허까지 갖고 있다니 금상첨화였다. 적어도 사는 동안 밥은 굶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꿈은......... 이루어진다.'
잠시 정신이 혼미했던 신혼시절이 지나자 문제점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맛은 둘째 치더라도 일단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게다가 조리가 끝난 주방은 그야말로 전쟁터 같았다. 뭔가 문제가 있음을 알았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아 그런 것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아내는 그 믿음을 가볍게 무너뜨렸다. 가끔 가족 외 다른 손님이 찾아올 때면 부엌은 온갖 조리기구들로 도배되다시피 했고 음식을 장만하는 시간은 시간대로 오래 잡아먹었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손님에게 최선을 다 해 대접하고픈 아내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자신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포기해도 될 텐데 아내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을 지켜보기만 했으나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참전을 결정했다.
'꿈은....... 깨졌다.'
"야!! 니는 남자가 뭘 그런 것까지 다 알고 그라노. 나중에 니 마누라 누가 될지 모르겠는데 여자 입장에선 그거 상당히 피곤하데이. 행여나 그런 거 있어도 모른 척 그냥 넘어가래이."
대학 졸업 후 오랜만에 모인 1박 2일 동기 모임에서 콩나물국을 끓이던 여자 동기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때는 친구가 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겐 그 누구보다 집안 살림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있었고 주방 시스템 전반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 아내의 부족한 부분만 조금씩 채워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내가 원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아내는 내가 하는 조언들을 간섭과 잔소리로 받아들였고 연이어 몇 마디를 던지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렇게 잘하면 직접 해 먹든가!!"라는 잔뜩 날이 선 반격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설프게 봉합을 하고 덮어 나갔다. 일시적인 평화는 찾아왔지만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문제였기에 그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해답은 상상조차 못 한 엉뚱한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난여름,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에 배우 경수진 씨가 출연했을 때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공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조명이나 가구를 설치하고 척척 만들어내는 솜씨에 감탄한 적이 있다. 경수진 같은 여자와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상상도 잠시나마 했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만들 때마다 '못질도 제대로 못하는 남자'. '피스 하나 제대로 못 박는 남자' 취급을 당할 것만 같았다. 말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조언이었을지 몰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기간 아내에게 독설처럼 내뱉었던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아내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으니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난장판을 만들던 주방도, 완성된 요리가 되기까지 걸리는 오랜 시간도 전직 영양사라는 직업적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조리와 동시에 설거지며 주방 청소를 진행해야 하는 가정과는 달리 모든 것이 분업화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구조에서 오랜 시간 일을 한 사람이니 그 습관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부터 우리 집은 분업화를 시도하고 있다. 간단한 상차림은 딸아이가 하고 아내는 요리에만 집중을 한다. 난장판이 되어가는 주방은 수시로 내가 정리를 한다. 각자 할 일을 하다 보니 이전과는 달리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아이에게는 살아있는 교육이 되기도 한다. 아내는 아내대로 과도한 부담을 덜게 되었고 나는 묵언 수행을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 과정에서 나름 보람을 느낀다.
언젠가 점심 상을 물리고 커피 한 잔 하며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기분 나쁘게만 듣지 말고 내가 질문 두 개만 할게. 도대체 그 실력으로 조리사 면허는 어떻게 땄어? 필기시험이야 그렇다 치고 실기시험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 초과로 불합격했을 거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처음 당신 집에 가서 먹었던 그 반찬들 있잖아. 그거 당신 솜씨 맞아? 먹어도 먹어도 그때 그 맛이 나지 않아서 그래."
"그거? OO시장 반찬 가게에서 산 건데. 왜? 맛있더나? 다시 가서 사 올까? 지난번에 보니까 그 집 아직 장사하고 있던데. 그리고 시험은 다행히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거 나왔더라고. 무생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시장표 반찬이라니....혼자서 착각한 것이기에 어디 가서 사기를 당했다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아내의 요리 실력 중 그나마 봐줄 만한 게 칼질이고 또 그나마 먹을만한 게 무생채인데 하필 그게 나오다니 이 여자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게 아닌가 말이다.
남은 커피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으며 아내가 듣지 못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거 이 정도면 완전히 면허 남발 수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