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의 남왕(男王)이 되기까지
태생부터 그러했다.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의사소통이 가능할 무렵부터 의지와는 무관하게 모든 심부름은 내 차지였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기본적인 라면 끓이기는 10살 무렵 터득을 했다. 형들이 시키면 잘 끓지도 않는 냄비를 지켜보며 1시간가량(체감상 걸린 시간) 연탄불 앞에 쪼그려 앉아 라면을 끓여야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를 거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집안 살림은 어머니 혼자 하는 것인가. 전형적인 가부장 스타일의 아버지는 그 흔한 밥상 옮기기조차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께선 남자는 원래 부엌 근처도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뭔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다.
거짓말 같겠지만 매년 겨울 김장철이 되면 어머니는 배추 50포기의 김장을 혼자 하셨다. 그리고 사나흘을 꼬박 앓으셨다. 형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무렵엔 어머니 혼자서 매일 도시락을 7개씩 싸셨다.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시장을 가실 때마다 혼자서 커다란 시장바구니를 끙끙거리며 들고 오셨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철이 들 무렵에는 어머니가 시장 가실 때마다 따라나섰다. 표면적으로는 시장 구경과 함께 군것질을 하는 것이었지만 장바구니를 나눠 들기 위함이었다. 어머니께선 늘 괜찮다 하셨지만 내가 들 수 있을 만큼의 작은 봉지를 하나씩 나눠주셨다. 각종 야채와 생선을 고르는 안목이 생긴 건 이때부터였다. 가격 흥정을 하거나 덤으로 봉지에 더 담아서 들고 튀는(?) 뻔뻔함도 이때 배웠다.
대학 다닐 때 친구 이모가 운영하는 기사 식당 겸 웨딩 뷔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맡은 일은 쏟아져 들어오는 접시를 1차로 씻고 건조기에 넣은 후 세척과정이 마무리된 접시들을 홀에 진열해놓는 일이었다. 아침에 출근해서는 각종 야채와 재료들을 다듬는 일까지 했다. 처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주방 어머님들도 나중에는 나를 인정하셨고 마지막에 그만둘 때에는 못내 아쉬워하셨다. 톱클래스에 가까운 설거지 실력은 이때 갖추었다.
1996년 겨울, 큰 형수님께서 둘째 조카를 출산하고 어머니께서 산후 도우미로 떠나시며 주방에 관한 전권을 내게 맡기셨다. 평소에도 웬만한 여자들보다 훨씬 낫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으셨는지 몇 가지 기본 반찬을 해두시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주방일만큼은 니를 믿는다."라고 하셨다. 26년을 살면서 어머니로부터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그렇게 2주간 꼼짝없이 주부의 삶을 살았다.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던 '주부 라이프'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간단하게 보자면 그저 밥을 하고 국을 끓여서 만들어진 반찬과 함께 차리면 그만이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새벽 6시 출근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4시 30분이면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는 것까진 어떻게 해보겠는데 그게 며칠 반복되면서 아버지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입맛이 까다로운 아버지 셨기에 같은 반찬이 3일 이상 반복되는 것은 어떤 수를 써서든 막아야 했다. 지금 같으면 유튜브나 블로그를 보고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그저 시장이나 마트를 돌며 머리로 메뉴를 만들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어느새 전형적인 전업주부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께서 출근하시면 남긴 음식을 대충 양푼이에 넣어 입에 털어 넣고는 설거지를 하고 이불을 꺼내 밖에 널고 청소를 하고 커피 한 잔과 함께 방바닥에 드러누워 아침 드라마를 보고 방송이 종료되면(그 당시엔 종일 방송이 아니었다) 널어 둔 이불을 털어서 장롱에 넣고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낮잠을 잤다.
마지막 이틀을 남겨두고 끓인 미역국에서 작은 옥에 티가 있긴 했지만 2주간의 미션을 겸한 실전 테스트는 큰 실수 없이 마무리되었다. 근처에 사시는 작은 이모께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전화까지 주셨지만 어쨌든 내 힘으로 잘 버텼다.
2주간의 '주부 라이프'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때 깨달았던 것들은 주부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첫째, 집안일은 하지 않으면 눈에 거슬릴 정도로 보기 싫은데 정작 하고 나면 뭘 했는지 티가 나지 않는다.
둘째, 매 끼니마다 다른 종류의 반찬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기도 한다.
셋째, 미역의 번식력(?)은 다산(多産)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열대어 구피의 번식력 따위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큼 폭발적이다.
넷째, 다른 모든 국들이나 찌개가 마찬가지겠지만 미역국은 끓일수록 소금이 되어가는 속도가 현저히 빠르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몰랐다. 훗날 이 경험이 내게 엄청난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리라는 걸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1등 신랑감이 될 자질 중 하나를 갖추었다고 생각했고 나중에 함께 살 여자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생각만 했다.
아는 것이 힘이 된다지만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내와 한 가정을 꾸리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알더라도 적당히 알았어야 했다.
메인 사진 출처 : 본인 블로그 요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