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Nov 25. 2021

그날 밤 '이혼'을 외쳤다

'마음껏 놀다 오라'는 말의 함정

"오빠, 부탁인데 오빠는 제발 언니 가슴에 대못 박지 말아요.
절대 안 그럴 사람이란 거 알지만.... 꼭 부탁할 게."
후배의 아내가 보낸 그 문자는 힘들 때마다 한 번씩 나를 돌아보게 하는 지침(指針)으로 남아있다.


다투고 화해하고, 만났다가 헤어지길 반복하는 연인들 정도는 안되더라도 대부분의 부부들이 한 번쯤은 이혼을 고려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 부부도 정확히 딱 한 번 법원의 문턱까지 갈 뻔했다. 그날이 주말만 아니었어도 나는 지금쯤 화려한 솔로의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2년 2월이었다. 오랜 시간 블로그에서 인연을 맺어온 이웃이 부산 쪽에 출장이 있어 내려온 김에 얼굴이나 한 번 봤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창 블로그 삼매경에 빠져 있던 시절이라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지인 한 두명만 만나려던 계획이 생각보다 커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부담스러워 취소를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의외로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쉬지도 못하고 일하느라 고생했잖아. 하루라도 맘껏 놀다 와."


아직 어린아이를 데리고 몇 시간씩 일하는 아내를 두고 혼자 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치기도 아까워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까지 항상 지인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니기만 했던 터라 휴일을 맞아 인근에 사는 블로그 이웃들은 내가 픽업을 해서 부산 쪽으로 이동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현지에서 합류하기로 했는데 이게 화근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많아진 인원, 부산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는 서울 지인의 과도한 욕심(?)때문에 일정은 굉장히 빠듯하게 이어졌고 시간이 갈수록 내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게다가 퇴근 후 합류하겠다는 블로그 이웃분까지 생기며 저녁식사 후 헤어지려던 계획은 결국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아쉬움을 안은 채 만남이 마무리되었지만 사건은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터지고 말았다.


"!! 니는 인간이 나가서 어째 전화  통이 없노? 마누라 혼자  시켜놓고 마음이 편하더나?" 아무 생각 없이 차내에 있는 블루투스로 전화를 받은  실수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아내의 목소리에 동승했던 지인들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마 고속도로만 아니었어도 다들 그냥 내려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며 서둘러 끊었지만 아내는 집요하게 계속 전화를 걸었고 나는 그때마다 종료 버튼을 쉬지 않고 눌러댔다.


"집에 가서 괜찮으시겠어요? 괜히 저희 때문에...." 동승했던 블로그 이웃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을 꺼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 겪는 사람 입장에서야 놀랄 일이지만 이미 익숙해진 내겐  문제가 아니었다.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컸고 오히려 이렇게라도 아내의 가면이 벗겨져서 다행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게 당시 솔직한  심정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아내는 고리눈을 부릅뜨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없이 속사포처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맘껏 놀다 오라고 해서 맘껏(사실 하루 종일 운전만 했고  때문에 술도 마시지 못했다) 놀다 왔을 뿐이고 가는 사람 명단도  공개했고 사람이 많아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12 전에는 들어오겠다는 약속도 비슷하게 지켰다.


새벽 내내 시달리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이렇게는  이상    같다. 그냥 여기서 끝내자. 해달라는 대로  해줄 테니 생각해보고 원하는  있으면 말해."  길로 집을 나섰다. 동이  무렵이긴 했지만 여전히 쌀쌀한 날씨에 거리를 걸으며 방황 아닌 방황을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였다. 받지 않고 끊기를   반복하니 문자가 왔다. "들어와서  먹어."  아내는 자신이   있는 최선의 표현을 했다.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대로 버티기에 들어갈 것인지  이기는  들어갈 것인지.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마음을 먹게  결정적인 이유는 추위였다. 급히 나오느라 딸랑  하나만 주머니에 넣고 나왔기에  어떻게  방법이 없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딸아이가 자다 일어나 반겼다. 그 눈망울을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이 아이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앞으로 고난 속에 살아야 하는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나는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다. 아침이라기엔 많이 늦은 시간, 차갑게 식어 버린 밥상 앞에 앉아 몇 번을 다짐했는지 모른다. 카메라도 장롱에 넣어버렸다. 어차피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은 막대한 시간과 돈이 필요한 것이라 내 입장에선 사치라 생각했다.



행여 이 글이 마누라를 깎아내리는 글로 읽힐까 두렵다. 나는 이렇게 참으면서 살고 있다고, 그걸 알아 달라고 하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렇게 사는 부부도 있고 지극히 남자 입장에서 쓰는 글도 있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수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게 부부 사이다. 그 과정 중에 누군가 물러나지 않으면 전면전이 벌어지고 그렇게 되면 결국 갈라설 수밖에 없다.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로 잘 알려진 관중과 포숙이 어느 전쟁에서 그랬다고 한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휴전을 하고 물러나는 관중에게 포숙이 그 이유를 묻자 관중이 "물론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면 우리가 이기긴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네. 지금은 저 쪽도 강한 편이라 이쯤에서 실리만 챙기고 물러나는 편이 좋다는 게 내 생각이야."


나는 한발 물러섰고 실리를 택했다. 그게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닌지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후회는 없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10 가까운 세월을 살며 아내를 두고 혼자 나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친구가 승진했다며 점심을 사겠다고  길을 왔을   , 블로그에서 알게   아빠당( 남자 모두   명씩 ) 모임  저녁 식사를 겸한 술자리  ,  기억엔 그뿐이다.


딸 아빠당 모임 때도 저녁 7시에 만나 밤 10시쯤 헤어지고 집으로 왔다. 나간 김에 좀 더 있다 오지 왜 벌써 왔냐는 아내의 물음에 내가 대답을 해줬다.

"왜? 또 전화기에 대고 쌍욕 퍼부으실라고??"


나는 2012년 2월 이후 아내가 하는 '맘껏 놀다 오라'는 말을 절대 믿지 않는다.

다만, 맘껏 일할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