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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Nov 22. 2021

닭 먹으러 갔다가 무만 먹고 오지요

닭이라면 닭살 돋는 불쌍한 남자

"세상에~~ 무슨 남자가 닭을 못 먹어?"

"치맥도 못하시고 세상 사는 낙이 없으시겠어요."

이 나이 먹도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남자가 닭 잘 먹어야 한다는 법은 도대체 어느 법에 들어 있나? 치맥 안 하고 풀 뜯어먹으면서도 0.1톤 초식공룡이 되었다. 어쩔래??


대학 다닐 때 치킨집에서 회식을 한다는 공지가 뜨면 도망 다니기 바빴다. 대부분 닭을 못 먹는 나를 이해해 주었지만 가끔 악랄한 후배들에게 붙잡히는 날이면 회비는 회비대로 뜯기고 그놈들이 치맥을 즐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히 무맥(치킨무+맥주) 또는 케맥(케첩과 맥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처음부터 내가 닭을 먹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시장에서 사 오신 통닭을 어머니께서 잘게 찢어주시면 소금에 찍어 곧잘 먹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철이 들 무렵 도저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대형 참사를 겪은 후 그 트라우마 때문에 자연스레 멀리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 뿐이다.


그런 내가, 닭이라면 환장을 하는 여자를 만났다. 처음 연애하던 시절 아내와 닭을 먹으러 가면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남은 것들은 포장해서 같이 사는 동생 갖다 주라는 명목으로 닭을 먹지 않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얼마 가지 않아 아내는 내가 닭을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신혼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아내는 나와 함께 치킨집을 간 적이 없었다. 아내 입장에선 나로 인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한 셈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아내는 결혼 후에도 한동안 닭을 먹지 않았다. 나를 배려한다는 생각에서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하던 아내가 무너진 것은 뒤늦게 임신을 했을 때였다. 하루는 근무를 마치고 거실에 누워 잠을 자다가 거슬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내가 주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닭다리를 뜯는 모습이 보였다. 잠이 덜 깬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가 닭장에서 닭을 잡아먹던 그 장면의 재현이었다. 하필 아래위 흰색 잠옷에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으니 영락없는 구미호였다.


"지금 뭐 하는 건데?"

"아니...... 자기 피곤한데 혹시 깰까 봐 조용히 먹느라고...."

"그냥 여기 와서 먹어. 무슨 죄 지었어? 어디서 훔쳐 온 거 먹는 거냐고? 그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화를 낼 상황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밥상을 다 차린 후 부엌에 퍼질고 앉아 양푼이에 대충 반찬을 얹어서 드시던 그 모습이 생각나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나는 어린 마음에 그게 보기 싫어서 엄마가 우리 집 하녀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


그 후 아내는 내 눈치를 보며 닭을 먹는 일은 없었고 다행히 딸아이가 엄마 입맛을 그대로 물려받아 더 이상 한 마리 치킨이 냉장고에서 1주일 넘게 자리를 차지하는 불상사는 사라졌다. 여전히 나는 닭을 먹지 못하고 하염없이 치킨무만 축내고 있으며 그 덕분에 의지와는 무관하게 치킨무 감별사가 되어 버렸다.


'이 공장 제품은 질이 안 좋은 무를 썼구먼.'

'이 집 치킨무는 숙성이 좀 덜 됐어.'

'여기는 다 좋은데 포장 상태가 좀 안 좋네. 뜯기가 너무 불편하잖아.'


희고 고운 자태의 치킨무님, 저에게는 최애 안주입니다    사진 출처 : 본인

아주 어린 시절이긴 해도 예전에 먹었으니 지금이라도 도전해보는 게 어떠냐고 말하실 분 계시겠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다. 나는 이미 소처럼 풀만 뜯는 '소식가'가 되었고 치킨무와 너무도 깊은 사랑에 빠져 닭에게까지 내 사랑을 전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말이다.


지인들이 가끔 그런 말을 한다. 그래도 애 엄마가 아무 거나 잘 먹으니 애가 그걸 닮아서 건강하게 잘 자란다고. 그럴 때마다 헛웃음이 나온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하나하나 얘기를 꺼내 보면 그게 아님을 아실 텐데.


그래서 준비했다. 다음 이야기는 < 먹으러 갔다가 땅콩만 먹고 오지요>. 우리 부부가,  나아가 우리 가족이 먹는  때문에 얼마나 많은 충돌과 양보와 협상이 이루어지는지 밝혀볼 예정이다. 아내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먹는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닭은 그저 불행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행여 내가 왜 닭을 못 먹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계실 분에게 한 말씀드리자면
너무 알려고 하지 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내가 말을 꺼내는 순간 향후 3년간 닭을 드시기 힘들 거라고.

이건 내가 확실히 장담한다.


메인 사진 출처
닭을 못 먹는 걸 아는 친구가 내게 생일선물로 보낸 모 치킨(골드킹 콤보) 쿠폰 사용 시 촬영
생일을 맞아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인지....
친구가 아니고 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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