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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y 05. 2022

선생님, 여긴 112 상황실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넌 이상하게 자기 자신에게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더라. 남에게 하듯 스스로에게 조금 관대해질 수는 없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가정과 가게 일 모두 뜻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였을 때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다. 숨기고 싶은 비밀을 들킨 듯 뜨끔한 것도 잠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듯 나는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허점이 있을 수 있지만 내게 실수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런 내게 잊을 수 없는 두 번의 실수가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1989년 12월 15일 시행되었던 대입 학력고사 4교시 때의 일이었다. 답안지에 마킹한 부분이 단 하나라도 3초 이상 눈에 띄면 커닝으로 간주하겠다는 감독관의 한마디에 잔뜩 주눅이 든 나는 행여 감독관의 눈에 걸릴까 노심초사하다가 마지막 과목 생물에서 주관식 1번 문제와 3번 문제의 답안을 바꿔 적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1~2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던 시험에서 멀쩡히 두 눈 뜨고 4점을 날려 버린 것이었다. 차라리 두 문제 모두 몰라서 못 썼다면 모를까 2개의 정답을 각각 엉뚱한 곳에 쓴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다행히 다른 과목에서 점수를 만회했던 것인지 채점자가 은혜를 베풀어 두 문제 모두 정답으로 처리해준 것인지는 몰라도 합격통지서를 받음으로써 한동안 했던 마음고생은 끝을 맺었지만 그때의 실수는 나를 더더욱 매사에 철두철미한 '용의주도 미스터 윤'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십수 년이 지나 112 상황실에 허위신고를 했던 그날이 올 때까지는 그랬다.


문제의 두 번째 실수는 2000년대 후반쯤에 있었다. 지금이야 자체 앱을 이용해 주문하고 가상계좌로 결제하는 방식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종량제 봉투를 주문하려면 시설관리공단에 직접 전화를 걸어 일일이 품목과 수량을 불러줘야 했고 결제 대금도 배송 직원에게 직접 현금으로 전달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지급기에서 현금을 뽑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필요한 수량을 메모한 후 주문을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늘 하던 일이었기에 익숙하게 번호를 누르려는데 갑자기 오래된 형광등처럼 머릿속이 잠시 '깜빡'하는가 싶더니 이내 백지상태가 되어 눌러야 할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전화번호를 찾느라 우왕좌왕하는데 때마침 강한 바람이 불어 카운터 위에 올려놓은 지폐 다발과 메모지가 훌러덩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정신없이 달려가 날아다니는 돈과 메모지를 주워 제자리로 돌아온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

"OO실입니다. 말씀하세요."

"네, 100리터 50장, 50리터 100장, 20리터......."


"뭐라고요? 선생님, 천천히 다시 말씀해 주세요."

'이 양반이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라는 생각에 잠시 자동응답기에 빙의하여 정확한 발음과 좀 더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100리터 오. 십. 장, 50리터 백. 장...." 하는 순간 상대방이 말을 끊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전화 어디 하셨습니까?"

"어디긴요? 창원 시설관리....."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려는 순간 빛의 속도로 내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뿔싸!! 이거 자동 발신 장치가 작동했구나. 지금도 가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편의점 강도와 절도 사건 등에 대비하여 수화기를 들고 5초 이상 가만히 있으면 112 상황실에 자동으로 연결되는 서비스가 있었다. 떨어진 돈을 줍는 사이 꽤 긴 시간이 흘렀고 그 사실을 모른 채 나는 경찰에게 종량제 봉투를 주문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선생님, 여기 112 상황실입니다. 아무래도 자동 연결 시스템이 작동된 거 같은데 별일 있으신 건 아니죠?"

"아, 그게....... 제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돈이 날아가고..... 그거 줍고...... 아..... 네네. 아무 일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나는 그 후 한동안 경찰청에 종량제 봉투를 주문한 인간이라는 오명을 덮어쓰고 아내로부터 엄청난 조롱을 받았다. 항상 퍼펙트함을 추구한다고 자부하던 나였으니 아내 입장에선 내가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


 사건의 영향이 컸던 탓인지 나는  후로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에서 배우 조진웅 씨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했던 대사를  인생 최고의 명대사로 꼽는다. 세종대왕(송중기 ) 호위하는 내금위장 무휼 역을 맡아 왕의 명을 받드는 장면에서 목청껏 외치던 "무사~~ 무휼,  치의 실수도 없이 명을 수행할 입니다."라는 바로  대사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10여 년간 큰 실수 없이 살았다. 언제 정신줄을 놓고 실수 연발을 할지 알 수는 없으나 그때마다 조진웅 씨의 사자후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을 생각이다.

지금처럼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오타와 오기, 비문의 사용 같은 실수를 없애려고 최대한 노력을 한다. 실수를 하지 말라는 송중기에게 답하듯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해 글을 쓰고 있다.

"작가~~~ 아르웬, 한 치의 실수도 없이 글쓰기를 수행할 것입니다."


내 사전에 더 이상의 실수는 없다.



여성 분들, 송중기를 보지 말고 조진웅을 볼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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