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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Dec 22. 2021

같은 동에 강력한 라이벌이 산다

18층 형님, 제 선물은 없나요?

퇴근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항상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옆집 1002호(이하 가짜 호수) 문 앞에 산더미처럼 놓여 있는 택배박스들이다. 신선함을 강조하는 모 업체의 새벽 배송 박스는 매일 2~3박스씩 쌓여 있고 잊을만하면 생수 탑이 쌓이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집은 지금 문 밖에 나가지 않고 1년 버티기 미션이라도 수행하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그 집이 이사온지 2년이 넘었음에도 나는 1002호 입주민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택배 서비스를 즐겨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어쩔 수 없이 이용하더라도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품 중에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무게가 많이 나가더라도 배달 건수가 많아서 돈을 많이 벌면 좋겠다는 기사님과, 내 돈 내고 내가 시키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이용객이 있다면 딱히 반박을 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택배(그중에서도 무거운 물품)를 이용하지 않으려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도 직업상 새벽마다 엄청난 물량의 상품들을 받는다. 매일 새벽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물류 박스들을 정리하다 보면 어깨와 허리가 남아나질 않는다. 내가 내 손으로 주문하고 넣는 물건들임에도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아무리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남의 물건을 들고 나르는 게 얼마나 힘들까 싶은 생각에서다.



우리 아파트에는 아내와 함께 다니는 택배 기사님이 제법 있다. 그분들의 배송시간과 내 퇴근 시간이 거의 비슷해서 주차장에서 가끔 마주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분들이 일하시는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 아내분은 차에서 다음 코스 물량을 정리하고 남편분은 카트에 싣고 각 동에 배송을 나가신다.


그분들을 뵐 때마다 미안함과 함께 번갈아가며 가게를 지키는 우리 부부의 모습이 떠올라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어떻게 해서라도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뵐 때마다 고작 피로회복제 하나씩 사 드리는 것 외엔 없다. 거짓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우리 동에 천사가 나타난 것은 올해 초 설 연휴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퇴근길에 경비실을 지나치는데 책상 위에 선물이 담긴 쇼핑백과 박카스 한 박스가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끔 SNS에서나 보던 일이 우리 아파트, 그것도 우리 동에서 벌어지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선행의 주인공은 1804호였다.


'아니, 나 말고 이 아파트에 천사가 또 있다니. 이거 이렇게 된 이상 지고 있을 순 없지.'라는 생각에 아내에게 말을 하고 본격적으로 대결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나보다 통이 더 큰 아내이기에 분명 집안 기둥뿌리 뽑힐 정도로 강력한 이벤트를 계획할 텐데 그건 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1804호 주민의 선행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비록 명절이나 연휴 등 택배물량이 대량으로 몰릴 때에 한해서 하시는 분이지만 항상 스케일은 남달랐다. 이런 분이 같은 동에 살고 있다는 기쁜 마음과 함께 그 마음 씀씀이에 내가 감동을 받을 정도였다. 몇몇 택배기사님은 감사의 메모를 남기고 가시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만 산다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언젠가 한 번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20층에서 한참을 내려오지 않은 적이 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휴대폰을 꺼내 보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여성 두 분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뭐가 이래 오래 걸리노? 택배 아저씨 탄 거 아니가?"

"그러게, 내려오면서도 계속 걸리는 거 보니 택배 맞는갑다."


한참 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카트를 끌고 내리시는 택배 기사님을 향해 한 여성이 주변 사람 다 들릴 듯한 혼잣말을 했다.

"밑에서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좀 해주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람 면전에 두고 꼭 저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나? 저런 말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택배 기사님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인간에게 한소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해서 알아들을 사람이면 애당초 그런 말 자체를 안 할 사람이란 생각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며칠 후 물건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올라오는 다른 기사님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다. 고의인지 실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프로 주문러(?) 1002호가 한동안 우리 집 주소로 택배를 주문한 덕분에 안면을 익힌 기사님이셨다.

"오늘도 물량이 제법 많네요. 제가 엘리베이터 계속 잡고 있을 테니 오늘은 좀 여유 있게 일하세요."

"아이고 그랬다간 큰일 납니다. 입주민들 민원 들어와요."

"저도 입주민인데요. 무슨 일 생기면 제가 책임질 테니깐 일단 올라가세요."


엘리베이터가 각 층에 멈출 때마다 기사님은 달리셨다. 내가 잡고 있겠다 말씀을 드렸지만 혹시나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입주민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인지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이윽고 25층까지의 배송이 다 끝나고 내려오는 길에 남은 물량을 다 배송한 후 1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서 기사님은 내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1003호."

다행스럽게도 1층에서 기다리는 입주민은 없었고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장사를 하며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자기가 찾는 물건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카운터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한테 굽신거려야 한다는 생각 등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들이 그만한 비용을 지불하고 받는 서비스라는 생각이니 그 모든 게 당연한 거라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택배기사님들에게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에 최대한 빨리 배송되어야 하고 문 앞에 친절히 모셔놔야 하고 배송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보내야 하는 등 모든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한 번이라도 기사님들 일하는 모습을 자세히 보시라고. 그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다면 당신은 참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얼마 있지 않으면 연말이고 곧이어 설 연휴가 다가온다. 1804호는 또 어떤 이벤트를 마련할 것인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번 기회에 프로 주문러(?) 1002호도 동참을 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벌어지면 좋을 텐데. 나는 평소에 잘하니깐 걱정하지 마시고.




아래 영상은 1804호와 비슷한 케이스를 담은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aoPmfao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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