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Oct 11. 2022

최후의 5분이야? 끝까지 버티는겨?

목마른 내가 우물을 파야지

"아빠, 샴푸가 다 떨어졌는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어느새 웬만한 집안 살림살이는 내 담당인 것으로 알고 있는 딸아이에게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아 최대한 빨리 사놓겠노라 말했다. 


급한 대로 아무 거나 쓰면 좋으련만 굳이 특정 브랜드 제품만 고집하는 딸아이 덕분에 샴푸가 다 되어갈 무렵이면 항상 비상이 걸리곤 했는데 바쁜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잠시 그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아내가 좀 더 야무지고 빈틈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지만 적어도 이번 생에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아내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매사 플랜 B, C, D까지 갖춰놓고 용의주도하게 사는 타고난 성격에 결품을 내서는 안된다는 직업병까지 더해진 나로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유형의 사람과 살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물론 아내의 그런 성격이 장점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여유만만 스타일이다 보니 잔소리가 드물어 그로 인한 충돌이 없다.


적어도 아내 기준에서는 쌀이 떨어지면 즉석밥을 사서 먹으면 되고 세제가 떨어지면 빨랫감을 빨래통에 차곡차곡 쌓으면 될 뿐이고 반찬이 없으면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실제 그렇다. 언젠가 한 번은 빨래통에 빨랫감이 넘치다 못해 다용도실 전체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라 피곤해서 빨래를 못하나 보다 싶은 생각에 아내 대신 세탁기를 돌리려고 보니 세제와 유연제가 빈 통으로 나뒹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알아서 잘 사놓는 사람이니 언젠가는 빈 통을 볼 것이고 그걸 보면 당연히 살 것이니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떨어지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성격이 아님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다 떨어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하지 않고 버티기라니 강적도 이런 강적이 없다.


이런 성격이니 샴푸가 떨어진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알고 있었냐고 물었더니 물을 붓고 통을 흔들어 섞으면 3일은 더 쓸 수 있다는 알뜰주부 코스프레 성 발언이 이어졌다.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알뜰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플 뿐이라 애써 못 들은 척 외면하고 말았다.


몇 번 이런 경험을 하고 보니 가게에서 하던 일을 집에서도 하게 된다. 수시로 욕실, 주방, 다용도실을 돌아다니며 샴푸, 비누, 세제, 치약 등등의 개수를 체크해야 하고 언제쯤 소진될 것인지 예상을 하고 배송일까지 고려해서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잠시 잠깐 한눈이라도 팔게 되면 서두에 언급한 불상사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집에서조차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아내와 처음 같이 살게 된 후 뭔가 조짐이 심상치 않아 주변의 인생 선배님들께 조언을 구한 적이 있는데 그분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한 게 '성격 급한 놈이 진다.', '가만 놔두면 언젠가는 알아서 한다.', '네 성격이 쓸데없이 부지런해서 일어난 결과다.'였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분들께 따지고 싶다. 

'가만 놔둬도 알아서 안 하던데요.', 

'제 성격이 급한 거 맞아요? 더 이상 어떻게 기다리고 있으란 말입니까?'


아무래도 나는 특수부대 생존훈련에 특화된 여자와 사는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무것도 갖추지 않고 어찌 그리 잘 버틴단 말인가. 다가오는 주말에는 아내에게 <최후의 5분>이란 군가를 가르쳐야겠다. 음치인 아내가 잘 배울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큐피드가 화살을 잘못 쏴서 그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