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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Oct 24. 2022

날 버리고 가시나

40대 중반 가시나(?)의 일탈 선언

난처한 상황에 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사자성어로 '진퇴양난'이라 한다. 뜬금없는 아내의 선언에 나는 지난 한 주 내내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흔쾌히 승낙을 하자니 낭비라는 생각과 함께 걱정이 되었고 결사반대를 하자니 속 좁은 남편으로 전락할 게 뻔한 상황에서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게 옳았던 것인지 지금 이 순간에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 모든 판단은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맡긴다.


수요일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교통편이 불편하기로 유명한 어느 학교에 딸아이가 일일체험을 갔다.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픽업을 하기 위해 늦은 오후, 차에 몸을 싣는데 아내로부터 카톡이 왔다. 주말에 친구와 함께 캠핑을 가도 되겠냐는 내용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의견을 묻는 것이었지만 뉘앙스만 놓고 보자면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다.


당연히 가도 된다고 답을 한 후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니 모든 게 즉흥적이라 할 만큼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뭔가 하나 결정을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불나방 스타일인 거야 진작에 알았지만 아무 계획 없이 일을 진행하는 게 불안해서 하나하나 문제점을 짚어가며 지적하자 아내는 점점 애걸복걸하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무 장비도 없이 어쩌시게요?"

"거기 가면 장비 다 갖춰져 있대."


"일요일에 가서 1박 하면 애들 학교는 어쩌고?"

"새벽에 출발해서 바로 학교로 가야지."


"입실이 늦은 오후라며? 산에 가면 일몰 시간도 훨씬 빨라서 가자마자 짐 풀고 나면 아무것도 못할 텐데?"

"그냥 가서 저녁 먹고 얘기나 하는 거지."


"그 먼 곳까지 가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몇 시간 만에 돌아온다고? 12만 원이라는 거금을 뿌리고?"

"나 한 번은 꼭 해보고 싶어서 그래."


아무리 이해를 하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딸아이도 황당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그 돈으로 사고 싶은 옷 사고, 먹고 싶은 거 사 먹는 게 낫지 않냐는 딸아이 말에 아내는 기세가 한 풀 꺾이긴 했지만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참다못한 딸아이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양심이 있는 거냐고 쏘아붙였다. 지난번 코로나에 걸렸을 때 내가 아내 몫까지 일하느라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 것을 기억하는 딸아이는 일요일에 자기 엄마가 일하는 시간까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태를 걱정한 것이었다.(효녀 났네 효녀 났어) 


물론 아내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 MT나 수련회 등을 통해 캠핑 생활을 경험했던 나와는 달리 펜션이나 리조트 문화에 익숙한 아내 입장에선 캠핑이라는 게 살아생전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은 로망이었을 게 분명하다.


만약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계획을 세워 토요일 아침에 출발해서 일요일 저녁쯤 돌아오는 일정을 잡았더라면 나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아이가 어릴 적 문화체험 형식으로 1박 2일, 2박 3일 과정의 캠프를 갔을 때도 군말 없이 보내줬을 정도로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 정도 희생이야 얼마든지 해줄 용의가 있다.


다만 이번 경우처럼 순간의 감정에 휘말려 갑작스럽게 일을 진행하는 것만은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며칠 동안 각종 회유책을 써가며 딸아이를 데려가려던 아내의 노력은 아빠 혼자 일 시키면서까지 갈 수 없다는 딸아이의 단호한 태도 때문에 무산되었다. 부녀 연합군의 공세 때문인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리한 결정이었다는 판단을 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는 결국 캠핑을 포기하고 일요일 하루 동안 친구와 만나 여기저기 다니며 수다를 떠는 것으로 대체했다.


험한 산골짜기에 아줌마 둘과 아이들만 보내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던 차에 그걸 포기했다는 얘길 들으니 내심 반갑기는 한데 한 편으로는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그깟 캠핑이 뭐라고 그거 하나 못해주는 나는 도대체 뭐하는 놈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아는 형님 중에 주말마다 나 홀로 캠핑을 즐기시는 분이 계신다. 언젠가 한 번은 형수님이랑 딸이랑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왜 매번 혼자 가시냐고 물었더니 둘 다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혼자 다니는 거라 하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자주는 못 가더라도 어디 갈 때마다 가족 모두 함께 하는 내가 부럽다고도 하셨다.


그런 걸 보면 세상은 요지경이고 인생은 아이러니란 말이 맞는 듯하다. 어찌 보면 공평한 것 같기도 하고. 누구는 시간이 남아도 가족 구성원 성향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고 누구는 함께 하고 싶어도 함께 할 시간이 없는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상실감이 클 아내를 위해 나는 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깊이 고민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이번에는 또 어떤 꽃으로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지 걱정이다. 웬만한 꽃으로는 그 마음 누그러뜨리기 힘들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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