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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an 10. 2022

할머니, 저 쉬운 남자 아닙니다

충무 할매가 주신 사랑을 감사히 받아 삼켰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충무김밥은 한국인이 만든 최고의 음식이라 생각한다. 비교적 간단하게 만들 수 있고 조리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편이다. 기본 반찬 3개만 마련되어 있다면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충무김밥이다. 이쑤시개 하나만 있으면 될 정도로 먹기에도 편하고 다 먹은 후 쓰레기를 처리하기에도 용이하다.


살짝 맛이 든 섞박지와 어묵 볶음, 그리고 오징어무침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삼위일체 반찬의 조화도 훌륭하고 결정적으로 오래도록 우려낸 듯 깊은 맛이 나는 뜨끈한 궁물(왠지 국물보다 맛있어 보이는 어감)이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런 이유로 충무김밥을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들어 빼앗아 먹는 딸아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라 얼마를 먹든 혼자 편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좋다.



8월쯤으로 기억된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그날은 유독 일이 많았다. 이미 고된 업무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기에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건 고사하고 밥을 차리는 것조차 귀찮을 것 같았다. 최대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고 퇴근길에 평소 자주 이용하던 충무김밥집을 찾았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금세 포장이 되어 나온 김밥을 들고 집으로 온 나는 씻을 틈도 없이 급히 식탁에 앉았다. 꼼꼼하게 둘러싼 포장지를 벗기고 김밥 하나를 입에 문 후, 반찬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서둘러 국물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 뚜껑을 열었다.


'아니, 이것은?'

망망대해 같은 국물에 외로이 떠 있는 하트 모양의 파 한쪽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사람들은 이걸 두고 뭐라 그럴까 궁금해졌다.


파 한쪽이 나를 향해 '사랑해'를 외치고 있다.


이 정도면 충무김밥 할머니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한 거라고 나는 강력히 추정하는 바이다.
하트 모양 파를 넣어주시다니.....
할머니, 저 쉬운 남자 아닙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더니 지인들의 악성(?)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과대망상증이라니 확대해석이라느니 하는 댓글들은 그나마 양반 축에 속했고 비록 농담이긴 해도 몇몇 여성 분들은 '이래서 남자들은 안돼. 작은 거 하나로 큰 착각에 빠진단 말이야.' 라며 남성 전체를 호도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어떤 누님은 내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호되게 질책을 하기도 했다. '너 쩡이 엄마 만날 때도 식당에서 다소곳이 수저를 놓는 모습에 반했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정신 차릴 때도 됐지 싶은데. 제발 나잇값 좀 해라."


아니, 이렇게 억울할 때가 있나.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조금만 관심을 주면 공주병에 걸려서 정신 못 차리는 여자들 내가 정확히 3,752명은 본 거 같은데. 강하게 반박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몇 달이 지난 일이긴 해도 나는 아직도 포장을 하며 내게 보내주신 할머니의 눈빛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누가 뭐래도 그 눈빛은 사랑이 가득 담긴 그윽한 눈빛이었다. 역시 나는 연상녀에게 어필하는 비주얼이었을까?

'할매, 남자 보는 눈이 꽤 높으신 건 알겠는데 어쩌죠? 저는 남은 인생, 두 여자만 사랑하기로 맹세했어요. 하나는 제 딸이고 나머지 하나는 배우 한효주 씨라는 게 함정이지만요. 아무쪼록 건강하게 사시면서 오래도록 제가 먹을 충무김밥 책임져 주셨으면 합니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아내에게 간단하게 충무김밥이나 해 먹자고 말해봐야겠다.

아마 아내는 그 큰 눈을 부릅뜨고 말하겠지.

"먹는 니는 간단하지. 만드는 나는 뭔데? 그게 말만 하면 뚝딱 나오는 건 줄 알아? 그냥 사 먹어."

아무래도 할매를 만나러 다시 가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과연 이번에는 하트를 몇 개나 넣어주시려나.



사족) "원래 파 썰면 저런 모양 나와요"라는 댓글 다시는 분은 기필코, 당장, 확실히 인연을 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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