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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Apr 17. 2022

내가 재벌이 될 상인가?

당신들 말이 왠지 점점 틀려가고 있는 것 같은데

돌잡이 때부터 싹수가 보였던 것인지 형님 두 분이 돌잔치 때 연필을 쥐고 끝내 놓지 않았던 것에 비해 나는 연필을 들고 허공에 한 번 휘휘 저은 후 냅다 집어던지고는 돈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고 한다. 유일한 증거이자 증인인 어머니의 말씀뿐, 내 기억엔 전혀 없으니 100% 신뢰를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나는 유독 돈에 관심이 많았다는 얘길 들었다. 걸음도 못 걷던 갓난아기 시절에도 아버지 월급날만 되면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기어가서라도 끝끝내 월급봉투를 손에 쥐었다는 얘기는 살아오는 동안 수백 번도 넘게 들었다.


인생이 걸린 수험생 시절엔 공부하느라 힘들 텐데 잠깐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후배 커플의 연락에 아무 생각 없이 찾아갔던 사주 카페에서 당장 시험 준비하는 것 그만두고 장사를 하는 편이 낫겠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 양반이 신기(神氣)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커플의 미래(우여곡절이 많을 거라는 얘기였는데 결국 10년 만에 이혼)도 맞히고 내가 자영업자의 길에 들어선 것을 보면 아주 틀린 말을 하진 않은 것 같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고객을 맞이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정말 다양한 손님을 만나게 된다. 내 명찰을 보고는 혹시 파평 윤 씨냐며 반갑다고 불쑥 손을 내밀며 몇 대 손이고 파는 어떻게 되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억양이 귀에 익어서 그러는데 혹시 고향이 대구 아니냐며 뜬금없이 지연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이런 것도 어떻게든 공통된 연결 고리를 찾으려는 한국인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그중에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유형의 사람이 뜬금없이 관상이나 손금을 봐주는 사람이다. 희한하게도 그런 분들의 특징은 대체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포스'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거다. 이건 직접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런 분들이 카운터 앞에 서면 뭔가 알 수 없는 이상한 기운에 압도되는 느낌이 든다.


흘리는 듯한 말투로 "음.... 우리 사장, 돈 좀 만지겠어."라는 분, "얼굴에 재물이 가득한 관상이야."라고 알듯 말 듯 한 한마디를 툭 던지고 제 갈 길 가시는 분,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 후 "생긴 게 맘에 안 들어도 절대 성형 수술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특히 인중에서부터 눈언저리까지, 그러니까 코는 절대 건드리면 안 돼요."라고 비교적 상세하게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으며 괜히 사람 손을 잡고는 "굉장히 부지런한 손이야. 뭘 해도 해야 하지 가만히는 못 있는 손인데 관리 잘하세요."라는 분까지 그 유형은 각양각색이다.


차라리 어디를 방문해달라며 노골적인 홍보를 한다든가 일정액의 복채(?)를 요구한다든가 하면 사기꾼이라 치부해 버릴 텐데 그냥 몇 마디 말만 그렇게 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니 그런 분들이 한 번씩 다녀가고 나면 한동안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최첨단 세상을 살면서 뭐 그런 미신 같은 것을 믿냐고 그러겠지만 나는 사람마다 각자 정해진 길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길을 찾은 사람들은 세상을 비교적 쉽게 살아갈 것이고, 반면에 그렇지 못한 이들은 수많은 난관을 뚫고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고 끝내 그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힘든 인생을 살아갈 것이란 생각이다.


올해로 장사라는 것을 시작한 지 22년째이고 그동안 그런 분들을 10여 명 넘게 만나고 보니 내가 진짜 돈을 많이 만지는 게 맞는지, 그분들이 지금 이 직업 자체를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훗날 돈에 파묻혀 살게 된다는 뜻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아르바이트생 시절, 장사에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사장님의 단 한마디를 시작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 기준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돈을 만졌다면 많이 만졌을 수도 있고, 아직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겠다.


설마 지금처럼 개고생을 하며 사는 이 모습을 보고 돈 많이 만진다 그랬다면 그건 순 엉터리가 아닌가. 특히, 요즘처럼 만질 돈은 거의 없고 형형색색의 카드만 받았다가 결제 후 바로 돌려주는 전체 매출의 90% 이상이 카드 매출인 세상에선 말이다.


이상하게도 가게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는 그런 분들의 방문이 뜸한 편인데 가끔은 그분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만약 다시 한번 그런 손님들을 맞게 된다면 그때 가서는 강제로 붙잡아 자리에 앉히는 한이 있더라도 좀 더 구체적인 것을 물어봐야겠다. 도대체 돈 좀 만진다는 기준의 금액은 얼마인지, 그리고 그 시점이 언제인지.


그날이 오면 그분들에게 꼭 말하고 싶다.

"관상가 양반들~ 어째, 내 얼굴이 재벌이 될 상인가? 제발 내 죽어 관 안에 노잣돈이 뭉치로 들어오는 것이라는 말은 말아 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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