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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an 19. 2022

가끔은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더라

성격상 맞진 않지만


"사장님, 진짜 오랜만이죠? 저 기억하시겠어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성 고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한 번 스치듯 지나간 인연이라도 웬만해선 얼굴을 기억하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내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 얼굴이다. 머뭇거리는 내게 그 고객은 말을 이었다.

"예전에 저한테 마스크...."

마스크 소리를 듣자마자 비로소 생각이 났다.

"아..... 기억납니다."


2020년 3월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고 급격히 확산되던 시기, 한창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우리 가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상품 발주는 전면 중단된 상황이었고 일괄 배당으로 들어오는 물량은 주 2회 배송 모두 합쳐 봤자 30개 내외였다. 구매 수량 제한에 대한 법적 강제성은 없었지만 당시 본사에서는 1인당 2개 이하로 판매하라는 내부 지침을 내렸었다.


하루에도 100여 명 가까운 손님들이 마스크를 사러 왔다가 헛걸음을 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마음이 아팠다. 단순히 가게 매출 때문만이 아니라 빈손으로 돌아가시는 고객들을 볼 때면 왜 미리 대비를 못 했을까 자책도 하고 그렇게 가시는 분들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너무 죄송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아침, 거동이 조금 불편한 70대 어르신 내외를 모시고 여성 한 분이 들어왔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추정해본 즉 시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며느리임에 분명했다. 그 고객은 창가 테이블에 어르신 두 분을 앉아 계시도록 한 후 카운터로 왔다.


"사장님, 죄송한데 혹시 마스크 구할 수 있을까요?"

예의 바른 행동과 함께 단아한 외모에서 나오는 말투는 30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품이 넘쳐흘렀다. 평소 같았으면 재고가 없다고 죄송하다며 돌려보냈을 테지만 왠지 그날은 그래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나란히 앉아 계신 두 어르신의 모습에서 부모님이 떠올라서였을까 어떻게든 챙겨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배송이 되는 날이긴 한데 몇 개가 들어올지는 저도 모릅니다. 얼마 전부터 점포별 배당 중이거든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10분 정도만 기다려 보시죠. 배송차 들어올 때가 거의 다 되어 가는데."

확신 없는 나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다리겠다고 대답을 했다.


잠시 후 배송차가 도착하고 15개의 마스크가 입고된 것을 확인한 후 필요한 만큼 가져가시라 했다. 보통의 경우 이럴 때 대부분의 고객은 싹쓸이를 하려 하는데 비해 그 상황에서도 그 고객은 다른 사람들 걱정을 했다.

"구매 수량 제한 있는 거 아니에요? 이거, 제가 다 사 가면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해요?"


순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려다가 말았다. 1인당 2개밖에 팔 수 없는데 특별히 드리는 거라고 곧이곧대로 얘기를 해서 고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수량 제한 같은 거 없으니 원하시는 대로 가져가시라 했다.

"그럼, 10개만 가져갈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돈 받고 물건을 파는 것일 뿐인데 내가 왜 이렇게 과한 인사를 들어야 하는 것인지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그 고객은 연신 고개를 숙여가며 인사를 했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었던지 드시고 싶은 게 없냐고 계속 물어보시는데 더 있다가는 내가 오히려 불편해질 것 같아 거의 반강제적으로 댁으로 가시게 했다.




그날의 에피소드가 그렇게 일단락되고 며칠이 지나 아내로부터 카톡이 날아왔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얼마 전 마스크 10개를 사 가신 그 여성분이었다.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노라고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다며 대신 인사 좀 전해달라며 커피를 맡기고 가셨다고 한다. 얘기를 들어보니 집사람에게도 연신 감사하다고 사장님 덕분에 어르신들 외출 때 걱정을 덜었다며 인사를 계속했다고 한다.


비록 그날 그분이 10개를 구매하신 관계로 다른 많은 고객들이 발걸음을 돌리셨지만 나는 그날의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적어도 그 당시 상황에선 내가 최선의 판단과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극강의 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로? 어르신들은 건강하시죠?"

"네, 두 분 모두 건강하세요. 시댁 왔다가 지나는 길에 사장님 보여서 인사나 드리고 가려고 잠깐 들렀어요."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젊어지셨어요? 지난번에 뵈었을 땐 30대 초반 정도로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거의 20대 중반 같아요. 나이를 거꾸로 드시는 건가?"

"사장님도 참.... 제가 요즘 살이 좀 빠져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젊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눈 후 발걸음 가볍게 집으로 돌아가는 고객의 뒷모습을 보며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 고객에게 두 번의 거짓말을 한 셈이다. 마스크 구매 수량에 대해 한 번, 그리고 두 번째 방문에서 나이에 대해 또 한 번. 그 두 번 모두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장사를 하다 보면 수많은 선택의 상황이 주어진다. 불가피하게 원칙을 어겨야 할 때도 있고 모두에게 고른 배려를 하지 못할 때도 있다. 때에 따라선 앞선 경우처럼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도 단 하나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더 큰 것을 잃지 않겠다는 나만의 철칙만큼은 지키려고 노력한다.


오늘도 나는 오랜만에 오신 손님에게 작은 거짓말을 했다.

"염색하셨네요?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남자가 보라색 염색하기 쉽지 않은데 잘 어울립니다. 10년은 젊어 보이세요."

"에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래도 싫은 표정은 아니다. 때로는 거짓말이 진실보다 더 나은 효과를 가져올 때도 있다. 나는 그 고객의 마음을 얻었다. 물론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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