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지 않나?
손님이 드문 일요일, 이른 아침 편지지를 사러 오신 40대 남자 고객이 있었다. 손편지를 거의 쓰지 않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 한정된 공간에 다양한 상품을 구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겨우 구색 맞추기용으로 한 종류를 진열해두고 있는데 그걸 손에 든 고객은 '이거다'라는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내게 양해를 구한 후 그는 아내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고 답을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도 답이 없자 한참을 카운터에 서서 기다리는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 결국 그 고객은 직접 전화를 걸었다. 서너 번 신호음이 울렸을까 싶은 순간 마침내 통화가 되고 전화기 너머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렸다.
"어..... 왜요?"
“OO엄마, 방금 사진 보냈는데 확인 좀 해줄래요? 무턱대고 사 가기엔 디자인이 좀 그래서.”
그 후로도 아내와 몇 마디 더 주고받던 그 고객은 결국 편지지를 사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대형 문구점이나 팬시점이 문을 열 테니 그때 가서 구입하시면 될 것 같다는 내게 그 고객은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가게 문을 열고 갔다.
나가는 고객의 뒷모습을 보며 만약 우리 부부가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카톡을 보낸 지가 언제인데 확인 안 하고 뭐하냐며 노발대발했을 것이고 평소 대화 수준을 고려해본 즉, 통화 중에도 잔뜩 날이 선 표현들이 오고 갔을 것이 분명하다. 모르는 사람들 보기에 늘 부부싸움에 가까운 톤으로 대화를 하는 우리 부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을 직접 눈앞에서 보니 그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부부간에 존댓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부부의 애정 전선이 '항상 맑음'을 표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전투적인 우리 부부가 늘 서로에게 칼을 겨누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아내를 대할 때 좀 더 다정다감한 표현을 쓰면 어떻겠냐며 조언을 가장한 간섭을 하는 경우가 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친구 같은 부부 관계를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편한 친구 사이라 해도 서로에게 막말을 사용하거나 상처가 되는 말을 해서는 안됨을 잘 안다. 간혹 선을 넘는 팩트 폭격을 한 적은 있지만 함께 사는 동안 아내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한 적은 하늘에 맹세코 없다(고 생각한다).
작년 가을 무렵 지인의 요청으로 잠깐 상담을 해준 적이 있다. 남편이 뭘 사줬네, 오늘은 남편이랑 뭘 같이 먹었네, 매일 사진을 올리며 자랑하듯 하루 일과를 보여주던 그 지인이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은 이야기 끝에 나온 한마디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우리? 쇼윈도 부부잖아."
나이차도 없고 연애기간도 길었던 그 부부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부부였다. 보는 사람들이 시기와 질투를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일매일이 행복 그 자체였던 그런 부부가 쇼윈도 부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부부관계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절대 알 수 없음을 또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딸아이가 태어나고 아내와 진지하게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 보는 앞에서 너무 막 나가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냐는 내 말에 아내도 동의를 했었고 한동안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 부부에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처럼 초강력 회귀본능이 작용했다. 거기엔 형식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묵시적 동의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나잇값을 못한 채 10대 후반 청소년들이나 쓸 법한 막말을 구사하며 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예전처럼 누가 보든 말든 앞뒤 가리지 않는 전투 모드의 언어 사용을 지양하고 남들의 시선을 고려한다는 점이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교대 시간이 다 되어 나와 아내를 같이 보려고 가게로 찾아온 아는 동생 앞에서 아내는 내게 극존칭을 써가며 열연을 펼쳤다. 거의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급의 불꽃같은 연기였다. 순식간에 변하는 태도 변화에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한마디 던졌더니 그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그냥 평소대로 하지? 보는 사람 오해하겠네. 왜 갑자기 존댓말을 쓰고 그래? 집에서 하던 대로 막말하셔야지."
"에이, 왜 그러세요? 제가 언제 막말을 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32년 전 신입생 환영회 때 먹은 파전이 올라오는 듯했다.
역시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 존댓말하고 살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