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이 여사 이야기
자고 일어났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언뜻 보니 까만 김에 둘러 싸인 주먹밥처럼 보이길래 이 사람이 웬일로 남편 출근길에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준비했나 싶었다. 기쁜 마음에 얼른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린 후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이란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했는데 자세히 보니 시커멓게 탄 빵이었고 오래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20년 동안 거의 모든 음식을 태워 오신 태우기의 달인 '버닝' 이 여사님께서 오늘도 한 건 하신 모양이었다.
"저건 뭐야? 나 몰래 초코 크루아상이라도 구우셨나 봐?"
옆에 있던 딸아이가 내 말에 박장대소를 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내가 1분 30초만 돌려도 된다고 했는데 굳이 2분 넘게 돌려서 저렇게 됐어."
"냅둬, 너거 엄마 저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죽어도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망한 게 한두 개 여야 말이지."
"둘 다 시끄러!! 하나는 어서 들어가서 자고 하나는 빨리 출근해."
결국 아내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초콜릿 없는 초코 크루아상 제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얼마 전 모 작가님께서 같은 재료를 써서 같은 레시피대로 똑같은 요리를 하는데 왜 시어머니표 음식과 자신의 음식에 차이점이 있는가에 대한 글을 올리신 적이 있다. 그 작가님의 깨달음에는 '불의 세기'와 '끓이는 시간'이라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아내가 요리하는 장면들이 오버랩되었다.
냉정하게 말해 아내는 꽤 요리를 잘하는 편이다. 어디 내놔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요리를 하고 있으니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지난 20 년간 전혀 개선이 되지 않는 단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게 화력 조절이다. 국이나 찌개를 끓이면 조림에 가까운 요리를 만들고 생선이나 전을 구우면 온 동네가 알아챌 정도로 심각하게 태운다.
처음 얼마 동안은 저러다가 스스로 깨닫는 날이 오겠지 싶어 그냥 모른 척했으나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서 아주 가끔은 작정을 하고 일장연설을 할 때가 있다.
"이것 보세요. 아주머니. 요리의 기본은 시간과 불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강한 불로 해야 할 요리가 있고 처음에는 강하게 가다가 점점 화력을 줄이면서 조절을 하는 요리도 있고 아예 약하게 시작해서 오랜 시간 달이듯 하는 요리도 있어. 어째 당신은 모든 요리가 강으로 시작해서 강으로 끝나? 가스레인지나 인덕션 만드는 회사에서 폼으로 레버나 버튼을 붙여 놓은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럴 때마다 아내는 그렇게 잘하면 직접 해 먹으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곤 한다. 대부분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한발 물러서며 흐지부지 끝을 맺고 말지만 간혹 불꽃이 튈 때면 서로 양보 없는 전쟁을 하기도 한다. 여느 부부들이 성격차이나 경제적 문제로 다투는 것에 비해 우리 부부의 전쟁 발화점은 거의 90% 이상이 주방이다.
다시 크루아상 이야기로 돌아와,
아내가 만든 크루아상 사진을 SNS에 올렸더니 지인들의 반응이 성별에 따라 정반대로 엇갈렸다. 모든 남성 지인들은 '힘내요' 스티커와 함께 침묵으로 일관했고 여성 지인들은 '웃겨요' 스티커와 함께 "저도 그래요.", "아내분이 저랑 같은 과네요.", "그 정도면 괜찮은데요."와 같은 응원성(?) 댓글이 줄을 이었다.
그중 유독 눈길을 끄는 하나의 댓글이 있었으니, 꽤 오래 인연을 이어온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지인의 댓글이었다.
"예전부터 알았지만 쩡이맘 참 피곤하겠다. 어쩌다가 쓸데없이 아는 거 많은 남자를 만나 가지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면 좋았으련만 왜 나는 알지 않아도 될 부분을 많이 알아서 이 고생인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누가 그랬어? 때로는 아는 게 부부싸움의 근원이 되는구먼. 그런데 말이야. 나도 사실 많이 힘들거든. 당대 최고의 이론 전문가이자 입으로만 요리를 하는 '마우스 셰프'와 살다 보니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블랙 김치전 먹어 봤어요? 블랙 부추전 먹어 봤어요?
안 먹어 봤으면 말을 마세요. 맛이 아주 끝내줍니다.
덧) 여성 독자님들의 돌팔매질 대환영입니다만 인신공격까지는 가지 말아 주세요.
관련 글 링크는 아래에...
https://brunch.co.kr/@arwen/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