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Jan 17. 2022

아빠 그만 좀 찾으면 안 되겠니?

딸아~!! 이제 엄마에게도 애정을 좀 나눠주렴

밤에 일을 하고 이른 오후에 퇴근하는 생활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엄마 노릇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중 하나가 딸아이의 초등학교 시절 학부모 참관 수업이었다. 지극히 형식적인 그런 행사를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불참했을 경우 딸아이가 받을 상처가 걱정이 되어 내리 2년을 아내 대신 참석했었다. 나만큼이나 그런 모임을 극도로 혐오하는 아내는 그때마다 일한다는 핑계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사실, 학부모 참관수업이라고 해봤자 학부모가 하는 건 거의 없다. 아이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교실 뒤에 서서 지켜보다가 끝난 후 나눠주는 설문지에 형식적으로 '매우 좋았다' 체크를 하고 개선할 점은 '전혀 없음'이라고 써주는 게 끝이다.


문제는 맞벌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불참을 하는 몇몇 학부모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빠가 아닌 엄마들이 온다는 점이었다. 추세가 그렇듯 선생님도 대부분이 여자, 교육청에서 나온 장학사도 여자, 행정실 직원도 여자, 뒤에 선 학부모들도 대부분 엄마들이니 당연히 교실에 성인 남성은 나뿐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모든 시선이 내게 집중되는 듯한 그 민망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행여 엄마들이 귓속말로 속삭이는 모습이 보일 때면 모두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어머, 저기 저 뚱땡이 아저씨는 교육청에서 나오신 분일까요?'

'에이, 설마요. 교육청에서 나온 분이 아래위 등산복을 입고 오셨을까.'

'그쵸. 누구 아빠일까요? 엄마 없는 한부모 가정인가?'

'아저씨 행색을 보니 그런 거 같죠?'

혼자서 오만 가지 상상을 다 하곤 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문제였다. 대개 초등학생 엄마들은 그런 기회로 인맥을 만들고 친분을 쌓게 되는데 나 혼자 아빠이다 보니 끝나고 갖는 식사나 커피 모임에 끼는 것도 불가능했다. 물론 같이 가자고 먼저 말을 꺼낸다 해도 손사래를 치고 줄행랑을 쳤겠지만.


2년 연속으로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해가 거듭될수록 엄마들의 친분관계도 그에 따라 비례를 했기에 내가 가는 순간 그분들에게도 민폐 아닌 민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3년 차에는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기.... 아주머니, 올해는 저 대신 좀 가시죠. 다녀오시는 동안 차라리 제가 일을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나도 물론 가고 싶지. 근데 당신 딸이 엄마 대신 무조건 아빠가 와야 된다잖아. 나는 선택권이 없어."

잔뜩 장난기 머금은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부터 딸이 하는 말 들었다고 그래? 모임에 자꾸 빠지는 것도 안 좋아. 엄마들이랑 얼굴도 좀 익히고 해야지. 간 김에 같이 점심도 먹고 커피도 한 잔 하고 와."

"알았으니까 뒷감당은 당신이 해. 아마 당신 안 왔다고 쩡이 히스테리 장난 아니게 부릴 거야."

가까스로 설득해서 아내를 학교로 보냈다.


한참 후 아내는 비꼬는 듯한 말투와 함께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좋겠네. 훌륭한 딸 두셨어. 엄마들이 당신 딸 작품 보고 참 독특한 아이라고 하더라. 다들 엄마 감사합니다, 엄마 사랑해요 적어 놨는데 당신 딸만 아빠 어쩌고 저쩌고 해 놨으니."


'귀 기울려' 라는 잘못된 표현이 눈에 들어오는 나는 맞춤법에 민감한 브런치 작가



몇 개월 전 아이 진료를 위해 아내와 번갈아가며 한의원에 간 적이 있다. 그때 간호사 선생님이 엄마보다 아빠와 더 많이 대화를 하는 딸아이는 처음 봤다며 그 비결이 뭔지 물으신 적이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딸과 사이가 좋은 아빠의 모습이 신기하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바꿔 말하면 그건 아빠와 가까운 그 거리만큼 엄마와는 멀어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세상 일에는 적정선이라는 게 있고 균형이란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육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부모의 어느 한쪽과 지나칠 정도로 가까운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원인이겠지만 딸아이는 분명 아내보다 내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인위적으로 균형을 맞출 생각은 없다.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가 힘에 부치거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아내가 대신해줬으면 하는 희망사항과 그보다 우선 딸아이가 유아기 때만큼은 안되더라도 가끔은 엄마도 좀 찾았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퇴근해서 밥상을 차릴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바닥 일체형 공주병 환자 하나와 날마다 그 환자와 소리 높여 싸우는 여왕이 하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고 받는 질병 속에 싹트는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