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Dec 20. 2021

주고 받는 질병 속에 싹트는 사랑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는데 질병은 나누니 둘 다 환자가 되네

대학 다닐 때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 같은 친구가 있었다. 지금이야 손잡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꽤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혼전 동거 생활을 그 친구는 1990년대 초중반에 대학생 신분으로 내게 보여 주었다.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생활을 했던 그 친구가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이, 친구. 남녀가 같이 살면 체질도 바뀌고 그래?"

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내 물음에 그 친구는 말없이 왼쪽 손목을 보여주었다. 허물이 벗겨지고 작은 수포들이 터지고 여기저기 딱지가 앉은 손목을 보고 놀라는 내게 그 친구는 얼마 전 시장에서 산 팔찌가 문제인 것 같다고 했다. 한때 유행처럼 번지던 10원짜리 동전을 녹여 만든 팔찌, 구입할 때엔 24K 못지않은 광채를 자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색이 바래고 코팅이 벗겨지는 싸구려 팔찌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피부가 그리 약한 편이 아니거든. 생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연실네(여자 친구 가명)랑 같이 살면서 이상하게 피부가 약해지는 거 같네. 알다시피 연실네가 피부가 좀 민감한 스타일이잖아. 잠자리를 같이 하다 보니 체질도 서로 바뀌고 그러나 싶어서."


그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웃어넘겼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말도 안 되는 그런 상황을 몸소 겪게 되니 마냥 흘려들을 얘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체질도 바뀌는 것일까? 전문가가 아닌 이상 과학적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그게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몇 년 전의 일이다.



아내는 연애시절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했던 것이 피부 질환이었다. 원래 피부가 민감하고 좋지 않았던 데다가 참을성이 부족해서 손톱으로 자주 긁다 보니 그 증상이 점점 심해진 상황에서 나를 만났다. 다른 곳은 크게 심하지 않아 그나마 괜찮았는데 무릎 아래쪽이 특히 심각했다. 오죽했으면 아내의 대학 동기들이 날 보고 "오빠, 미야(아내 가명) 감시 잘하셔야 돼요. 저희들 예전에 기숙사 생활할 때 얘 침대에 막 묶어놓고 그랬어요. 틈만 나면 긁어대서 저희들 그거 말리느라 너무 힘들었어요."라고 했을까.


그에 비해 나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 병원에 간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나름 건강체질을 자랑했다. 이 직업을 갖게 된 후 낮과 밤이 바뀐 밤샘근무를 하면서 생긴 비염 증상이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게 그나마 병이라면 병이었을 뿐 그 외에는 크게 아파본 기억이 없다.


이런 우리 부부가 서로의 체질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 5~6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부터 내 허벅지와 종아리 부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기에는 사소한 문제인 것 같아 그냥 참고 버텼는데 그 증상이 점점 심해졌다. 어느새 내 다리는 연애 시절 아내의 다리처럼 호피 무늬 레깅스를 입은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아내는 생전 그런 증상이 없다가 갑자기 비염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단 한순간이라도 화장지가 없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고 특히 환절기만 되면 옆에서 지켜보기 힘들 만큼 고생이 심했다. 용하다고 소문난 병원에도 가 보고 비염 전문 진료 병원도 찾았지만 진료를 받는 그 기간만 잠시 나아질 뿐 차도가 없었다.


희한한 건 내가 피부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아내는 상대적으로 피부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해졌고 아내가 비염 증상으로 고생할 무렵부터 나는 예전처럼 콧물을 달고 살던 고통에서 탈피를 했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실 분 계시겠지만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결과만 놓고 보면 나는 아내에게 비염을 주고 그 대가로 피부병을 받았고 아내는 내게 피부병을 던져 주고 내 비염을 가져간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질병을 나눠주면서 그 증상이 자신의 몸에 있을 때보다 훨씬 심각하게 변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인내심 극강을 자랑하던 나는 수시로 다리 여기저기를 긁어대기 시작했고 아내는 틈만 나면 코에 화장지를 꽂고 다녔다. 그날부터 비상이 걸렸다. 유경험자로서 그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잘 알기에 어떻게든 아내의 비염 증상을 완화시켜야만 했다.


백방 수소문을 해서 알게 된 것이 느릅나무 껍질이었다. 느릅나무 껍질을 달여 먹이면 비염에 좋다는 얘기를 듣고 한동안 그걸 달여 먹이느라 고생도 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게다가 느릅나무 껍질은 그 특유의 향과 점액질 성분 때문에 끓인 후 빠른 시일 내에 먹어야 하는데 아내 혼자서 그걸 다 마시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나도 완치된 상황이 아니었기에 치료하는 셈 치고 몇 번 마셔봤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중도 포기를 선언하고 얼마 남지 않은 것은 버렸다. 그다음 찾은 것이 작두콩이었다.


온라인에서 구매한 작두콩  사진 출처 : 본인 아이폰


작두콩 끓인 물은 보리차나 생수 대용으로 마셔도 될 정도로 큰 부담이 없다         사진출처 : 본인 아이폰

느릅나무 껍질에서 한 번 실패를 했던 경험이 있던 터라 작두콩 구매는 신중하게 접근을 했다. 배송비를 부담하더라도 제일 작은 사이즈로 주문을 하고 설명서에 적힌 대로 용량을 지켜가며 한 주전자를 끓였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물처럼 그냥 마시기에도 전혀 부담이 가지 않았다. 옥수수수염차나 보리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맛이었다.


물 대신 마신다는 생각으로 아내도 나도 가방에 한 병씩 넣고 다니며 마시기를 6개월째, 100% 완치는 되지 않았지만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다. 예전처럼 10분 간격으로 화장지를 꺼내는 일도 없어졌고 잠을 잘 때 코를 틀어막고 자는 일도 많이 사라졌다.


비염을 앓고 있는 주변 지인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다들 작두콩에는 관심도 없고 얼마나 부부관계가 좋으면 질병도 주고받느냐며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고 한다. '이 사람들아 내 말의 주제는 작두콩이라니깐.' 아무리 항변을 해도 그들에겐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부부가 오래 살면 서로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단순히 외모가 닮아감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실제 연구결과에서도 외모가 닮아간다는 것은 비과학적이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면 무엇이 닮아간다는 뜻일까? 성격, 가치관, 화법, 표정 같은 수많은 것들 중에 질병도 포함됨을 얼마 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한정된 공간, 같은 환경에서 함께 생활을 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생긴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의 좋은 점만 닮아 가면 좋을 텐데 어쩌자고 우리 부부는 사이좋게 질병을 나눠 가졌을까. 이젠 한 가지 바람뿐이다. 부디 아내가 나의 뱃살만큼은 탐내지 않기를, 양치질하다가 흘리는 치약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넉넉한 뱃살에 의해 좌절되는 불상사는 없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이런 남편 또 있을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