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생활은 원맨쇼가 아니다
'시나브로'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순우리말로 널리 알려진 이 단어를 처음부터 싫어했던 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내가 할 일은 늘어갔다. 분명 시나브로였다.
우리 부부가 외벌이였다면, 맞벌이 부부라도 여느 부부처럼 일반적인 직장인이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고 그때마다 내 결정은 '내가 다 마타하리(맡아 하리)'였다. 그게 못난 남편 만나 고생하는 아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고 사랑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아내가 출산을 하고 산후조리원에 들어갈 형편이 되지 않아 산후도우미 생활을 하기도 했고 태어나자마자 집보다 가게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던 아이와 멀어지지 않기 위해 유치원을 다닐 때엔 하원을 함께 하고 씻기고 저녁을 먹이는 것까지 담당했다. 아내가 가게에서 일을 하니 당연히 내가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밤샘 근무를 마치고 와서 잠깐씩 쪽잠을 자면서 그 일들을 하는 것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아내가 퇴근을 했을 때 조금이라도 할 일을 줄이기 위해 주부들이 해야 할 일들까지 덤으로 했다.
그 생활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몸과 마음에 병이 생겼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당연히 아내가 해야 할 일들이 되고 마는 '제로썸 게임' 같은 상황에서 내 한 몸 그냥 참고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난생처음 '과로사'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오른팔이 고장 난 것이 그때였다. 꾸역꾸역 참다가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식당에서 일하세요?"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식당 아줌마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증상이라 했다. 며칠간 물리치료를 받고 팔꿈치에는 보호대를 차고 다녔다. 가게에서 일할 때마다 인근 식당 사장님들이 네가 그걸 왜 차고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후에도 몸은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왼쪽 손목, 어깨, 허리가 순서대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하나가 탈이 나고 그걸 치료하면 또 다른 곳이 고장 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눈치 없는 아내에 대한 서운한 생각이 드는 한편 차라리 모르는 게 다행이라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형!! 제발 형수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좀 줘요. 형이 형수보다 더 잘하고 더 똑똑하고 더 나은 거 아는데 그렇게 모든 거 형이 다 처리하다가 형 죽고 나면 형수는 제대로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부족해 보여도 맡길 건 좀 맡겨요. 계속 지금처럼 살면 두 사람 다 불행해집니다."
몇 년 전 온라인 기타 카페에서 알게 된 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게 그즈음이었다. 카페 활동을 그만두고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던 중 무심결에 나온 내 신세한탄에 동생은 아주 작정을 하고 훈계를 했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대학 졸업과 함께 사업을 시작했고 결혼도 일찍 해서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동생 같지 않은 동생의 말이라 흘려들을 수만은 없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로부터도 비슷한 말을 듣긴 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을 너무 완벽하게 관리를 하려는 내 잘못이라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과연 저들의 말처럼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맞는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동생이 했던 말 중에서 '성장'과 '죽음'이라는 두 단어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잘해보겠다고 했던 것들이 하나둘 잘못된 결과로 나타났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아내가 실패와 실수를 되풀이하며 쌓아야 할 경험의 시간들을 뺏은 격이 되었다. 이대로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살던 아내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루라도 빨리 내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라도 시작해야만 했다.
"아줌마, 이번에 OO은행에서 특판 상품이 나왔는데 그게 금리가 높은 대신 1인 1계좌에 월 납입액이 제한적이야. 나는 어제 만들었거든. 출근하는 길에 잠깐 은행 들러서 입출금 통장 개설하고 어제 준 돈으로 적금 통장도 만들어. 신분증 가져가는 거 잊지 말고."
첫 시작은 금융 거래였다. 몇 개 되지도 않고 현금도 얼마 없지만 모든 통장이 내 이름으로 되어 있고 그동안 자산 관리 자체를 나 혼자서 하다 보니 아내 명의로 된 통장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아내는 금융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인증서와 OTP카드 발급, 필요한 금융 앱에 대해 설명해 주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은퇴한 이후에는 모든 관리를 맡길 테니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배워두라고 했다.
여전히 내 눈에는 부족해 보이는 살림살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손을 놓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겠지만 예전만큼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이해를 해달라고 말했다. 집안이 돼지우리가 되든 마구간이 되든 당분간은 지켜보기로 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치우쳐진 저울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