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부부 내에서 메인 보컬과 '다정다감'을 맡고 있는 리더 아르웬이에요."
아마 우리 부부가 아이돌 그룹처럼 방송에 출연해서 인사를 한다면 나는 이런 멘트를 날려야 할 것 같다.
대구에서 30년, 나머지 21년을 경남에서 살아온 오리지널 경상도 남자인 내가 '다정다감' 캐릭터라니 당치도 않다.
통화 무제한 요금제를 쓰면서도 한 달 통화시간이 30분(그중 90% 이상이 아내와 딸)을 겨우 넘길 정도로 입 떼는 걸 싫어하는 내가 강제로 '다정다감'행 열차를 타게 된 것은 오로지 아내 덕분(?)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만큼은 아내의 무뚝뚝함이 나보다 몇백 배 정도는 강력하다.
2014년 가을이었다. 살고 있던 아파트가 재건축이 결정되고 강제 이주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내 집 없는 서러움을 느꼈다. 그 전에도 집주인이 바뀌어서 쫓겨난 적도 있고 가진 돈이 부족해서 전세금에 맞는 집을 찾느라 분주하게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그때만큼 서러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한꺼번에 빠졌으니 당연히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렸고 전세 매물은 씨가 말라 가는 한편 '때는 이때다'를 외치는 집주인들은 경쟁하듯 과도한 월세를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아 집을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월세를 내는 것이나 이자 부담을 하는 것이나 돈이 빠져나가는 것은 같으니 차라리 쫓겨날 걱정만이라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억대 채무자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만 5년이 넘은 2020년 여름, 빚을 다 갚은 날 채무 관계가 소멸되었음이 기록된 등기부등본을 들고 한걸음에 아내에게 달려갔다. 기쁜 소식을 알려주면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바다를 만들면 난 뭐라 말을 하며 아내를 달래야 하나? 달려가는 내내 머릿속에선 각종 감동적인 멘트들이 줄을 지어 대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보, 그동안 고생했어요.", "아니야. 당신이 알뜰하게 잘 살아 준 덕분이지." 같은 닭살 돋는 멘트들은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임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그게 그렇게 좋나?"
아내의 짧은 한마디에 말문이 막혔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등기부등본을 보여주고 "저 오늘 빚 다 갚았어요."라고 해도 이런 반응은 보이지 않을 거다. 감정의 포인트가 나와는 극과 극임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우리 부부의 감정이 일치했던 것이 2011년 MBC에서 방송된 휴먼 다큐멘터리 <사랑> "엄마 미안" 편을 봤을 때였다. 이때는 주인공 서연이와 우리 딸의 나이가 동갑이라 감정이입을 많이 한 탓인지 아내도 나도 방송을 보는 내내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지금도 가끔 감동적인 영상을 보다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아내에게 보여줄 때가 있다.
"감동적이지 않아? 영상 보다가 울 뻔했네."라고 하면 그때마다 나오는 대답은 항상 똑같다.
"네가 이제 늙었구나." 아니면 "그건 네가 갱년기라서 그래."
타고난 성격이 무던한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문제지만 내 기준에서 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될 때엔 과할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도대체 이 여자는 왜 내게만 이러는 걸까?
나는 그 해답을 최근에 들어서야 찾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답은 '익숙함'과 '신뢰'였다. 아내는 나를 너무 신뢰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뭘 시켜도 기대 이상으로 처리를 하니 아내는 집안일 대부분을 내게 일임하다시피 했다. 그게 오랜 기간 이어지다 보니 익숙하게 받아들여지고 그로 인해 웬만한 일에는 감동을 받지 못하는 거다.
수입이 얼마가 되고 지출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5년이란 시간 동안 어떻게 돈을 갚아 왔는지의 과정을 전혀 모르니 나만큼 감동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거기에 더해 타고나기를 공감능력이 부족하게 태어난 사람이니 그것을 탓한다고 달라질 문제가 아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모든 것을 당연시하는 그 늪에서 아내를 꺼내 줄 때가 된 것 같다.
부부생활, 살면 살수록 참 쉽지가 않은 끊임없는 미션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