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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Dec 10. 2021

우리 집 냉장고는 블랙홀인가

아내는 내 인생 최대의 강적이다

늦은 봄 일요일 아침이었다. 웬만한 집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늘 그렇듯 두 여자는 일어날 기미가 전혀 없다. 어차피 아침은 물 건너갔고 조금 이른 점심을 준비하고자 냉동실 문을 열었다가 우수수 떨어지는 정체불명의 식품들에 하마터면 발등을 다칠 뻔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혼돈의 공간', 그게 우리 집 냉장고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냉동실은 엉망진창이었다. 아내가 제대로 정리를 못 하는 사람이란 거야 진작에 알았지만 똑같은 상표, 동일한 맛의 냉동만두가 3 봉지나 뜯어져 있었다. 안 봐도 뻔했다. 그냥 눈에 띄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뜯어서 쓰고 그대로 집어넣고 다음번에는 뜯어 놓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또 새 거 뜯고 하는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된 거다.


급한 대로 미개봉 상태의 만두는 비슷한 품목끼리 모으고 뜯어진 만두는 지퍼백 하나에 담았다. 첫 번째 칸을 정리하고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육류와 생선과 각종 양념들, 그리고 왜 그게 냉동실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식품들까지 서로 뒤엉켜 있었다. 증거 사진을 찍어서 before & after 비교 사진으로 협박을 하려다가 참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이런 말 하실 분 계실지 모르겠다. '저희 집도 마찬가지랍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을 겁니다.', '아내분이 일을 하시니 그 정도는 이해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말하는데 우리 집 냉장고보다 더 엉망인 집은 본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목구멍까지 솟아오르는 분노의 샤우팅을 억지로 누그러뜨리고 남은 것들을 마저 정리했다. 최근 1년 동안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은 것은 과감히 버리고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끼리, 육류는 육류끼리, 생선은 생선끼리 냉동 가공식품은 또 그들끼리 각 칸에 맞춰 정리를 하고 메모지에 대충의 수량을 적었다.


당장이라도 방에 뛰어 들어가 이불을 걷어 차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집안만 시끄러울 뿐 달라질 게 없음을 잘 알기에 이내 마음을 고쳐 먹고 내친김에 끝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냉동실에서 발굴(?)한 고대 유물 같은 동태포를 녹이고 달걀과 부침가루를 이용해 옷을 입힌 후 동태전을 구웠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부스스한 눈으로 나오는 다 늙은 큰 딸.

"당신, 냉동실에 동태포 있는 거 알았어 몰랐어?"

"이 아저씨가 진짜.... 당연히 알고 있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 당황하는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아는 사람이 왜 안 해? 저거 언제 구우려고? 내 죽고 나서 제사상에 올리려고 아끼고 있었나?"

"말을 해도...... 무슨 그런 말을."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길게 해 봤자 내 입만 아플 뿐. 그쯤에서 끝내는 게 서로를 위해서 낫다.


언젠가 이런 비슷한 문제로 친구(여사친)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너는 진짜 100점짜리 남편인데 마지막에 꼭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기껏 벌어 놓은 점수 다 까먹더라. 그냥 아무 말 없이 해주면 받아들이는 아내 입장에서 더 감동을 하지 않겠어?"


내가 그걸 왜 모르겠나. 뻔히 알면서도 말을 해야 하는 내 심정도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부부가 만약 딩크족이라면 속이 썩어 들어가더라도 나 혼자 그냥 참고 버티겠다. 문제는 딸아이가 보고 있다는 거다. 부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교육의 한 부분인데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게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언젠가 부부간 가사노동 분담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의 요지는 부부간의 충돌 원인이 대체적으로 남자가 이전 세대의 여성(대부분이 어머니)만 보고 자랐기에 자신의 배우자들도 어머니처럼 해주길 바라는 데서 온다는 주장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나 또한 못 하는 게 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세상 모든 여자는 다 그런 줄 알고 살았다. 너무 앞서 나가는 생각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내 딸이 나중에 어떤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가 지금의 나처럼 모든 걸 다 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큰 욕심이고 더 나아가서는 엄청난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아내와 내가 제대로 균형 잡힌 부부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인데 여전히 아내와 나는 엇박자로 놀고 있다. '아니, 이 여자는 전생에 겨우살이 준비하는 다람쥐로 살았었나? 좁아터진 냉장고에 뭐 그리 많은 것들을 저장하고 그러는 걸까? 미리 대비하는 거야 그렇다 치고 있는 걸 왜 또 사고 그래?'


늦은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설거지를 하며 말없이 냉장고 문에 붙여둔 메모지를 가리켰다. 제발 중복 구매, 이중 지출만은 하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 정도 했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 흉내는 내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정확히 반년이 지난 지금  기대는 당연히 무너졌다. 내가 써놓은 메모지는 아직  모습 그대로 냉장고 문에 붙어 있다.  손으로 직접 떼지 않는 이상 최소한 내년 이맘때까지는 그대로 있을  확실하다. 딸아이 초등학교 다닐  교통정리 자원봉사 어머니들 명단이 적힌 공문도 내가 5년이 지난 후에 참다못해  경험이 으니 더 말해 뭐하겠나.



살아생전에 완성형 부부의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겠다. 역시, 아내는 내 인생 최고의 강적이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나도 싸울 의욕이 생기지. 마지막에 누가 웃는가 어디 끝까지 한 번 가보자.


아내와 싸우려 드는 남편이 가장 지질한 남자라던데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도 그 길을 가고 있다.



모든 사진 출처 : 본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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