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내 인생 최대의 강적이다
늦은 봄 일요일 아침이었다. 웬만한 집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늘 그렇듯 두 여자는 일어날 기미가 전혀 없다. 어차피 아침은 물 건너갔고 조금 이른 점심을 준비하고자 냉동실 문을 열었다가 우수수 떨어지는 정체불명의 식품들에 하마터면 발등을 다칠 뻔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혼돈의 공간', 그게 우리 집 냉장고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냉동실은 엉망진창이었다. 아내가 제대로 정리를 못 하는 사람이란 거야 진작에 알았지만 똑같은 상표, 동일한 맛의 냉동만두가 3 봉지나 뜯어져 있었다. 안 봐도 뻔했다. 그냥 눈에 띄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뜯어서 쓰고 그대로 집어넣고 다음번에는 뜯어 놓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또 새 거 뜯고 하는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된 거다.
급한 대로 미개봉 상태의 만두는 비슷한 품목끼리 모으고 뜯어진 만두는 지퍼백 하나에 담았다. 첫 번째 칸을 정리하고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육류와 생선과 각종 양념들, 그리고 왜 그게 냉동실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식품들까지 서로 뒤엉켜 있었다. 증거 사진을 찍어서 before & after 비교 사진으로 협박을 하려다가 참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이런 말 하실 분 계실지 모르겠다. '저희 집도 마찬가지랍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을 겁니다.', '아내분이 일을 하시니 그 정도는 이해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말하는데 우리 집 냉장고보다 더 엉망인 집은 본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목구멍까지 솟아오르는 분노의 샤우팅을 억지로 누그러뜨리고 남은 것들을 마저 정리했다. 최근 1년 동안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은 것은 과감히 버리고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끼리, 육류는 육류끼리, 생선은 생선끼리 냉동 가공식품은 또 그들끼리 각 칸에 맞춰 정리를 하고 메모지에 대충의 수량을 적었다.
당장이라도 방에 뛰어 들어가 이불을 걷어 차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집안만 시끄러울 뿐 달라질 게 없음을 잘 알기에 이내 마음을 고쳐 먹고 내친김에 끝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냉동실에서 발굴(?)한 고대 유물 같은 동태포를 녹이고 달걀과 부침가루를 이용해 옷을 입힌 후 동태전을 구웠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부스스한 눈으로 나오는 다 늙은 큰 딸.
"당신, 냉동실에 동태포 있는 거 알았어 몰랐어?"
"이 아저씨가 진짜.... 당연히 알고 있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 당황하는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아는 사람이 왜 안 해? 저거 언제 구우려고? 내 죽고 나서 제사상에 올리려고 아끼고 있었나?"
"말을 해도...... 무슨 그런 말을."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길게 해 봤자 내 입만 아플 뿐. 그쯤에서 끝내는 게 서로를 위해서 낫다.
언젠가 이런 비슷한 문제로 친구(여사친)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너는 진짜 100점짜리 남편인데 마지막에 꼭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기껏 벌어 놓은 점수 다 까먹더라. 그냥 아무 말 없이 해주면 받아들이는 아내 입장에서 더 감동을 하지 않겠어?"
내가 그걸 왜 모르겠나. 뻔히 알면서도 말을 해야 하는 내 심정도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부부가 만약 딩크족이라면 속이 썩어 들어가더라도 나 혼자 그냥 참고 버티겠다. 문제는 딸아이가 보고 있다는 거다. 부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교육의 한 부분인데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게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언젠가 부부간 가사노동 분담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의 요지는 부부간의 충돌 원인이 대체적으로 남자가 이전 세대의 여성(대부분이 어머니)만 보고 자랐기에 자신의 배우자들도 어머니처럼 해주길 바라는 데서 온다는 주장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나 또한 못 하는 게 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세상 모든 여자는 다 그런 줄 알고 살았다. 너무 앞서 나가는 생각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내 딸이 나중에 어떤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가 지금의 나처럼 모든 걸 다 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큰 욕심이고 더 나아가서는 엄청난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아내와 내가 제대로 균형 잡힌 부부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인데 여전히 아내와 나는 엇박자로 놀고 있다. '아니, 이 여자는 전생에 겨우살이 준비하는 다람쥐로 살았었나? 좁아터진 냉장고에 뭐 그리 많은 것들을 저장하고 그러는 걸까? 미리 대비하는 거야 그렇다 치고 있는 걸 왜 또 사고 그래?'
늦은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설거지를 하며 말없이 냉장고 문에 붙여둔 메모지를 가리켰다. 제발 중복 구매, 이중 지출만은 하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 정도 했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 흉내는 내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정확히 반년이 지난 지금 그 기대는 당연히 무너졌다. 내가 써놓은 메모지는 아직 그 모습 그대로 냉장고 문에 붙어 있다. 내 손으로 직접 떼지 않는 이상 최소한 내년 이맘때까지는 그대로 있을 게 확실하다. 딸아이 초등학교 다닐 때 교통정리 자원봉사 어머니들 명단이 적힌 공문도 내가 5년이 지난 후에 참다못해 뗀 경험이 있으니 더 말해 뭐하겠나.
살아생전에 완성형 부부의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겠다. 역시, 아내는 내 인생 최고의 강적이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나도 싸울 의욕이 생기지. 마지막에 누가 웃는가 어디 끝까지 한 번 가보자.
아내와 싸우려 드는 남편이 가장 지질한 남자라던데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도 그 길을 가고 있다.
모든 사진 출처 : 본인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