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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Dec 08. 2021

웨딩 사진이 없는 부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과정이 누군가에겐 숨 쉬는 것처럼 쉽고 편하게 진행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할 만큼 우여곡절을 겪기도 한다.


불행히도 우리 부부는 후자(後者)의 경우였다. 우리 부부는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당연히 웨딩 사진도 찍지 못했고 웬만한 부부들이 다 챙기는 결혼기념일이란 것도 없다. 나는 처가 입장에서 보면 유령 취급을 받는 존재였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고 있다.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지고 누구 잘못이냐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꼭 한 가지 원인을 말하라면 나는 그게 아내 책임이라 말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 외에 아내만이 할 수 있는 지원군 만들기와 우리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해야 할 치밀한 작전 같은 것에 있어 아내는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다. 매사 천하태평인 그 성격 때문에 일이 꼬여 버렸다.


만약 입장이 바뀌어 우리 집에서 아내를 반대하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형수님들을 구워삶았을 것이고 그다음 형들을 설득했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이해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할 시기에 아내는 손을 놓고 있었고 그 공백을 어쩔 수 없이 내가 매우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처가에 밉보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을 허비한 결과 마련된 상견례 자리에서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무사히 상견례를 마치고 부모님을 보내드린 후 앉은자리에서 장인께서는 당장 날을 잡지 말고 좀 더 지켜보자고 하셨다. 당시 내 나이가 서른다섯이고 아내도 곧 서른이 될 텐데 뒤로 미루겠다는 건 어떻게든 결혼을 막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유라도 알아야 했다. 장모님께선 기다렸다는 듯 말씀하셨다.

"자네 어머니께서 집 사는 데 돈을 보태라고 하셨네. 그리고 우리 딸을 시집살이 시킨다고도 하셨고. 그게 상견례 자리에서 할 말이라 생각하나?"


기가 막혔다. 그렇게 말씀하실 어머니도 아니지만 그 자리에 동석하지 않았더라면 깜빡 속을 정도로 확신에 찬 말씀이셨다. 늦은 나이니 양가에서 낼 수 있는 만큼의 돈을 애들에게 줘서 혼수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대신 두 사람이 알아서 미래를 대비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말이 어떻게 집 사는 데 돈을 보태라는 말로 둔갑했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각 집안의 가풍과 법도가 다르니 가르칠 건 가르치고 배울 건 배우도록 하겠다며 그건 우리 아들도 마찬가지 입장이니 부족한 것 있으면 댁에서 잘 가르쳐달라 하신 것을 두고 뒷말은 잘라 버리고 어찌 앞부분만 언급하시는 건지 너무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쨌든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고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다. 몇 시간에 걸쳐 설득도 하고 설명도 드렸지만 두 분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기껏 이 꼴 보자고 갖은 수모를 겪으며 3년이란 시간을 보냈던 것인지 자존심도 상했고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를 악물어 가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수많은 말들을 걸러냈다. 마음 같아선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옆에 앉은 아내 얼굴을 보고 참고 또 참았다. 오랜 침묵이 흐르고 아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더 있어 봤자 달라질 것이 없다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아내를 자취방 앞에 내려주며 도저히 더 버틸 자신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서로가 에너지 낭비를 할 바에야 헤어지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별을 통보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대로 차를 몰아 그냥 벽에 가서 부딪힐까 생각도 했다.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다음날 아내는 모든 짐을 싸서 내가 사는 곳으로 왔다. 예나 지금이나 무모한 건 어찌 그리 한결같은지. 어떻게든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인생의 바닥에 살고 있는 나를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몸을 내던진 여자. 이런 여자를 버린다면 천벌을 받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모님께선 우리 식구들만이라도 모여서 예식을 올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형님 내외도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하셨다.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미 상처를 받은 아내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식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16년째다.



"형부~ 오랜만."

아내와 친자매처럼 지내는 아내의 친구 동생이 가게에 찾아왔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형부'라고 부르는 그 말에 주책없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 아내 몰래 처제에게 용돈을 쥐어 주고 싶었고 처남과 소주 한 잔 하며 인생을 논하고도 싶었다. 넉살 좋게 처형 댁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도 싶었고 장인 장모께 살가운 사위가 되고도 싶었다.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결코 하고 싶지 않은, 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얘기였다. 내게도, 그리고 아내에게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기억이지만 어딘가에서 꼭 한 번은 하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양가 부모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해 모은 돈 탈탈 털고 카드 대출받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가며 시작한 삶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같이 살기로 한 날, 아내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금 이 마음 끝까지 변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기념일만큼은 꼭 챙기겠다고. 결혼기념일, 정확히 말해 혼인신고 기념일이 되면 나는 아내에게 꽃을 선물한다. 인생 뭐 있겠나? 아내가 웃으면 그걸로 행복이지.


나는 이상하게 이름도 성도 모르는 꽃들이 좋더라고       사진 출처 : 본인 블로그


덧) 글이 너무 길어져서 줄였습니다. 내용 연결상 매끄럽지 않더라도 이해 바랍니다


메인 사진 출처 : 왕년에 지인들 웨딩 사진 찍어주러 다닐 때 직접 찍은 사진, 중이 제 머리 못 깎음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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