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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y 23. 2022

목수는 연장을 나무라지 않는다?

0.38mm의 기적

브런치 4 수생 시절의 일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브런치 작가 신청에서 3번을 떨어졌다. 처음 한 번은 대책 없이 블로그 글 복사해서 붙여 넣기를 해서, 그다음은 내 글빨만 믿고 주제 없이 닥치는 대로 써서, 그리고 마지막은 기성 작가들 흉내 내며 어깨에 잔뜩 뽕이 들어간 채 자기 계발서에 올라올 법한 글을 써서 탈락했다. 그즈음 페이스북 친구이신 편성준 작가님께서 올리신 사진을 보고 갑자기 멀쩡한 배가 아파왔다.


사진 출처  : 아래위 모두 편성준 작가님 페이스북 사진 캡처


"이거 보고 느끼는 거 없어? 남편이 글을 쓴다니깐 아내 되시는 분이 이렇게 펜을 선물했다지 않나?"

주말 오후, 함께 커피를 마시던 아내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나중에 장 보러 나가는 길에 하나 사 줄게. 뭐가 필요한데?"

꼭 보면 실력 없는 것들이 도구를 나무란다고 뭐라 할 줄 알았던 아내가 의외로 호의적인 대답을 했다.


"음..... 그러니깐 뭔가 좀 있어 보이면서도 럭셔리하고 왠지 글이 잘 써질 것 같으면서도 가늘게 나오는..... 0.38mm 정도 펜이면 좋겠는데."

"알았어. 안 그래도 저 가시나 학용품도 좀 사야 되고 하니 나간 김에 사 올게. 다른 건 필요 없고?"

일을 시키면 엉뚱한 짓을 잘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평소와는 달리 너무도 고분고분한 아내의 말에 일말의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그래도 그날만큼은 한 번쯤 믿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아내는 호기롭게 내 앞에 펜을 던졌다.

"어때? 맘에 드나?"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더니 필기감은 좋았다 ㅠㅠ


아내가 사 온 것은 디즈니 캐릭터 미니 마우스 펜이었다. 이건 마치 영화 <집으로>에서 유승호가 치킨을 사달라고 했는데 그걸 제대로 못 알아듣고 시원하게 닭을 삶아 버린 그 할매 같은 상황.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이런 유아틱 한 볼펜을 샀냐며 불만을 잔뜩 늘어놓는 내게 아내는 다분히 진지한 어조로 얘기했다.


"글 쓰는 데 펜이 중요하나? 니는 아직 작가도 아니잖아. 잉크 쓰는 펜 그거 쓰기 불편하데이. 그래도 내가 니 생각해서 미키 마우스 말고 미니 마우스 사 왔다. 니 여자 좋아하잖아. 확실한 건 그거 0.38mm라는 거."


애써 사 온 것을 두고 뭐라 할 수도 없고 그저 씁쓸한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그나마 아내가 사다 준 그 펜으로 글을 써서 4수 만에 브런치 작가를 통과했으니 아내의 정성(?)이 통하긴 했던 것 같다.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여전히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나는 펜으로 글 쓰는 것을 즐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쓰는 펜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지만 펜으로 글을 쓸 때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지우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때로는 실수로, 또 때로는 기기의 오류로 썼던 글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일이 없다는 것은 꽤 든든한 보험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가끔은 버리려 했던 문장들 중에서 되살아나 멋진 문장으로 완성되는 기적을 맛보기도 한다. 내가 초고를 노트북이나 휴대폰으로 글을 작성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내 노트에는 항상 미니 마우스 펜이 붙어 다닌다. 어느 순간부터 내 글쓰기의 부적처럼 사용되는 그 펜을 통해 앞으로 얼마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그 펜이 생명을 다 하더라도 나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목수가 연장을 나무라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나는 그 말에는 동의를 하지 않는다. 같은 값이면 토질이 더 좋은 밭에서 농사를 지으면 수확량이 늘어날 것이고 더 나은 연장을 이용하면 목수의 실력이 더 도드라지게 발휘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다가오는 내 생일에는 아내에게 비싼 펜을 하나 사 달라고 졸라봐야겠다. 비싸고 좋은 펜이 있다면 그 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초능력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 말이다. 혹시 알아? 미니 마우스 펜으로 브런치 작가 통과했으니 비싼 펜 사주면 밀리언 셀러 작가가 될지.


오늘도 나는 헛된 망상에 사로 잡혀 하루를 시작한다.

참고로 내 생일은 연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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