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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un 14. 2022

그녀의 체온... 36.9℃

신사임당, 마징가 Z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카페나 식당처럼 비교적 건전한 상권으로 탈바꿈하며 그 명성이 많이 쇠퇴했지만 내가 일하는 곳은 한 때 지역 최고의 유흥가였다. 주말을 즐기기 위해 멀리 서울에서도 원정을 올 만큼 유명한 'S동'이 신흥 유흥가로 떠오르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불야성이었고 밤을 잊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처음 이곳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30년 동안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자제로 살았기에 <팔도 미녀 총집합>, <아가씨 불러 드립니다>와 같은 홍보 문구가 적힌 에어간판은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민망했고 취객과 호객꾼이 뒤엉켜 흥정을 하는 광경을 볼 때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현실인지 상상 속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런 환경에서 야간에 일을 하다 보니 새벽 시간대에 오는 고객의 대부분은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거나 취객, 호객꾼 들이었다.


문제의 그날도 그랬다. 여느 때처럼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손님이 뜸해질 즈음 여성 한 분이 문이 부서져라 밀고 들어왔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좀비처럼 목을 자유자재로 꺾으며 걷는 개인기까지 선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만취상태가 분명했다. 그런 손님이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제발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넘어가기를...' 뿐이다.


몇 번의 휘청거림과 물건 셔틀을 반복한 후 카운터에 선 그녀는 마치 고래가 호흡을 위해 물을 내뿜듯(실제로는 물을 내뿜는 것이 아니다) 깊은 한숨을 내 얼굴에 뿜으며 혀가 잔뜩 꼬인 채 말을 했다.

"아저씨, 이거 던부 다 엄마에오?" (모두 얼마인가요?)

"네, 37,500원입니다."

"오케이, 아써요. 던부 본다이 다마주떼어." (알았어요. 모두 봉투에 담아 주세요)


걱정했던 것보다 순조롭게 넘어가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봉투에 물건을 담는 순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주머니도 없는 미니스커트 여기저기를 뒤적이던 그녀는 급기야 작은 핸드백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죄다 카운터에 올려놓고 돈을 찾기 시작했다. 각종 화장품, 담배, 라이터, 코... 코... 콘돔, 휴대폰이 카운터 위를 뒹굴었지만 어디에도 돈은 없었다. 초면에 외상을 요구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찰나, 그녀는 갑자기 블라우스 단추를 열고 가슴속으로 손을 짚어 넣기 시작했다.


'제발, 누나...... 그러지 마. 제발, 플리즈, 안돼~~~~~~'

간절한 나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더 더 깊숙하게 오른손을 가슴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시바사키가 팁을 여따다가 너가꼬......가이스키가.... 시바, 돈은 또 어디 갔노."  

(이 열여덟 님이 팁을 여기에 넣어서.... 강아지가.... 열여덟, 돈은 어디에 있을까)


쉴 틈 없이 쏟아내는 그녀의 욕설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눈앞에서 펼쳐진 속살 공개 쇼였다. 봐서는 안될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 또 무슨 트집을 잡힐지 모를 일이라 애써 무덤덤한 척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의 뒤적거림 후에 그녀가 꺼낸 것은 5만 원짜리 지폐로 고이 접은 마징가 Z였다. 어린 시절 수영장(?) 물을 가르고 힘차게 날아오르던 마징가가 어느 여성의 가슴속에서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낯선 풍경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카운터 위에 내동댕이쳐진 마징가 Z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남아 있었다. 


나무젓가락을 꺼내서 집어야 할 것인가, 장갑을 낄 것인가, 접촉 부분을 최소화하여 손톱 끝으로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듯 그냥 손가락으로 잡을 것인가. 1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 고사양 컴퓨터의 처리 속도보다 빠르게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고심 끝에 나는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했다. 어떻게든 빨리 해결을 하고 손님을 보내는 것만이 최선의 해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유 없이(없는 거 맞아?)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왼쪽 집게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을 이용해 마징가 Z의 주둥이를 잡았다. 순간 손 끝에 전해지는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장난감 거짓말 탐지기에서나 느낄 법한 짜릿함이 어깨를 타고 온몸에 전해졌다. 가까스로 계산을 끝내고 고객이 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른바 현자 타임에 걸려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주받아 마땅할 내 기억력은 머릿속에 정태춘 & 박은옥의 "사랑하는 이에게"의 노래 가사 일부를 계속 주입시키며 나를 괴롭혔다.

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오. 내 더운 가슴... 더운 가슴... 더운 가슴


썩어도 준치라 했던가. 비록 상권이 많이 바뀌어 예전보다 많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이 동네엔 '단란함'을 어필하는 업소가 몇 군데 남아 있다. 코로나 19 사태라는 사상 최악의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은 게 다행이다 싶긴 하지만 그런 업소들 중에는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 나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여성이 아버지뻘 되는 어르신들의 팔짱을 끼고 현금 지급기 앞에서 콧소리를 잔뜩 섞어 "옵뽜~~이걸로 되겠나? 돈 좀 더 뽑아라." 라며 온갖 애교를 떠는 것을 볼 때면 속이 거북할 지경이다.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 못 할 풍경은 오늘도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현금을 인출하고 돈을 주고받는 퍼포먼스가 끝난 후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껌종이, 각종 영수증 등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씩 주워 쓰레기통에 담는 내 눈에 조금 전 현금 인출을 했던 거래 명세표도 보였다. 

출금 290,000원 
잔액 7,330원 
수수료 500원

명세표에 찍힌 숫자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탈탈 털렸구나.'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학창 시절 배웠던 '수요와 공급'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있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여기저기 공급이 되기에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것인지..... 이런 경우엔 살기 위해 피를 빨아먹는 모기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모기에게 피를 빨리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십수 년째 지겹도록 보는 장면이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메인 사진 출처 : 유튜브 내 맘대로 종이접기 Oh ssam origami 중 마징가 제트 머리 호버파일더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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