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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ul 19. 2022

그녀가 내게 남긴 것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아니 되오

장사를 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중에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짜증이 밀려오는 사람도 있고, 남자인 내가 봐도 반할 듯한 남자들도 있으며 한 여자에 발목 잡혀 사는 인생이 아니라면 따라가서 전화번호라도 물어보고 싶은 여자도 있다. 


이건 단순히 그 사람이 미남 미녀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니다. 이쁘고 잘 생겼더라도 괜히 거부감이 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 평범한 외모임에도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사람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있다.


이 생활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사람의 겉과 속은 내가 생각했던 그 몇 배 이상으로 많이 다르다는 것을. 겉보기만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아침 출근길에 젠틀하게 인사를 하고 간 회사원이 밤에는 생양아치가 되어 온갖 진상질을 다 하는 경우도 있고 생긴 것은 조폭 뺨칠 정도로 험악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다정다감하고 온화한 말투를 쓰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사람은 껍데기만 놓고 판단해선 절대 안 된다는 점이다.


며칠 전 이른 새벽, 천사가 지상에서 생활을 한다면 저런 외모일까 싶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감히 단아함의 결정체라 말할 수 있는 여성 고객이 우리 가게를 찾은 것은 작년 여름 늦은 밤이었다.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고 바구니에 고이 담아 카운터로 와서는 살짝 가녀린 목소리로 "할인이랑 포인트 적립할게요. 봉투는 안 담아주셔도 돼요. 결제는 신용카드로 할게요."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단아한 외모와 더불어 똑 부러지게 말을 하는 사람이라니 이런 여자와 살게 될 남자는 전생에 우주를 열댓 번은 구하고도 남았을 거라 생각했다. 계산이 끝나고 "수고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넋을 잃고 쳐다보는데 그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출입문을 여는 순간 열린 문을 통해 커다란 나방이 그 손님의 얼굴을 향해 날아든 것이다. 손님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들고 가던 물건과 지갑, 핸드폰을 떨어뜨리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우왓~씨발!!! 깜짝이야."


혹시나 내가 못 본 사이 다른 손님이 들어왔나 싶어 주변을 살펴봤지만 매장에는 그녀와 나, 단 두 사람뿐이었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아까와는 전혀 다른 서문탁+보니 타일러+린다 페리+티나 터너의 보이스를 다 합친 듯한 허스키 샤우팅에 소리친 그녀도, 그 소리를 들은 나도 당황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허겁지겁 가방에 주워 담는가 싶더니 서둘러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가게 환기 시간이 되어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냉장고 아래쪽에 뭔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눈에 보이는 것만 급하게 주워 담느라 그 손님이 놓친 것이 분명했다. 손을 뻗어 꺼내 보니 콘돔이었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영롱한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 그녀가....'라는 마음속 바람과는 달리 어느새 내 머리는 19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비싼 것도 아니고 흔하디 흔한 물건이라 다시 찾으러 올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손님의 물건을 그냥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객님, 이거 제가 써도 될까요? 아.... 나는 쓸 일이 없구나


상황이 모두 종료되고 자리에 앉아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단아한 외모에 정신줄을 놓고 혼자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순간, 갑작스러운 상황에 반전의 매력을 뽐내던 고객의 모습을 보고 당사자 못지않게 당황한 나 자신을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사람을 외모만으로 평가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이 그토록 쉽게 무너지다니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일 수밖에 없나 싶은 생각에 마시던 커피가 유달리 쓴 맛으로 다가왔다.


오래전 블로그 활동을 하던 당시, 연세 좀 있으신 이웃님들의 말씀을 종합하자면 나는 미련 곰탱이처럼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예상 밖으로, 생긴 것 답지 않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보기 보다' 섬세하고 깔끔하고 예민하고 똑똑(?)한 편이라 하셨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나는 언제쯤 그런 혜안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다. 


365일 죽지 않고 무사히 살았다는 이유로 숫자만 하나씩 올렸을 뿐 정작 나잇값을 전혀 못하는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그날 나는 편견과 선입견 없이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과연 그녀가 내게 남긴 것은 콘돔 하나일까? 아니면 정신을 차리라는 가르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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