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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ul 26. 2022

"저도 신랑 있거든요."

내가 외로운 만큼 당신도 외로웠구려

여성들의 애교 지수를 수치로 계량화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그런 조사가 있다면 아내는 평균 이하를 기록하고도 남을 정도로 무뚝뚝한 사람이다. 그런 아내가 최근 들어 갑자기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자주 보인다. 주말에 같이 집에 있을 때 책을 읽거나 누워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옆에 와서 평소 하지 않던 콧소리를 작렬하며 아양을 떤다든가 외출 시에 어떻게든 나를 움직여 동행하려고 온갖 수작을 다 부린다든가 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그런 것이다.


지난 지방선거 사전 투표 날, 투표소로 향하는 길에 한 걸음 떨어져 따라오던 아내가 슬며시 다가와 손을 잡길래 화들짝 놀라며 왜 그러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이 사람이 왜 이러시나. 평소 집에서 하던 대로 하시지."

"아잉~ 밖에 나와서만이라도 친한 척 좀 하자."

냉큼 손을 빼며 남들 보든 안 보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하는 게 진심이지 꼭 누구 보란 듯이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고 한소리 했더니 입이 삐쭉 튀어나왔다.


그날 늦은 오후 살짝 잠이 들었는데 어렴풋이 인기척이 느껴져 실눈을 뜨고 돌아봤더니 거실에서 TV 삼매경에 빠져 있어야 할 아내가 어느 틈엔가 들어와서 바로 옆에 찰싹 붙어 백허그를 시도하는 게 보였다.

"이 아줌마가 진짜, 도대체 아까부터 왜 그래?"

잠을 설친 것만도 억울한데 더운 날씨에 옆에 붙는 게 너무 싫어서 한마디 했더니 아내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야!! 나도 신랑 좀 안고 누워 보자. 매일 밤마다 혼자 자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당신이 알기나 해?"


그 소리에 잠이 확 달아났다. 비록 상당 부분 농담이 가미되긴 했어도 언중유골이라고 아내의 그 말속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다. 같이 살아도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 힘든 상황에 퇴근하고 혼자 집을 지키는 나만 외로운 거라 생각했고 아내 곁에는 늘 딸아이가 함께 있어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훌쩍 자란 딸아이가 자신의 방에서 독립생활을 한 이후부터 아내는 넓은 안방에서 혼자 잠을 잤고 외로움이 조금씩 쌓여 왔던 게 분명했다.


장난스럽게 '죽부인' 대신 '죽남편'에 버금가는 커다란 곰인형이라도 하나 사줄까 말하고 말았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잘 모르는 이웃 주민들과 마주칠 때마다 이혼하고 딸 하나 키우는 사람 또는 남편과 사별한 과부 취급을 하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을 때만 해도 그저 아내의 자격지심 같은 것이려니 생각했다. 나도 낮에 혼자 나가면 실업자 취급을 하거나 혼자 사는 독거노인처럼 바라보는 사람들 많다고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하며 웃어넘기곤 했었는데 아내는 사람들의 그런 시선들이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한참 아내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아빠 없이 엄마와 함께 살던 친구 생각이 났다. 처음 이사를 온 이후부터 줄곧 아빠 없는 아이로 놀림을 받던 그 친구는 늘 기가 죽어 있었다. 무리에 끼지도 못하고 주변을 맴돌던 그 친구에게 반전이 일어난 것은 이사를 오고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국제 우편 봉투를 손에 쥐고 놀이터에 나타난 그 친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그동안 당했던 서러움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듯 소리쳤다.

"나도 아빠 있거든. 이거 아랍(UAE)에서 일하는 우리 아빠가 보낸 편지야. 너네들은 아직 비행기 못 타봤지? 우리 아빠는 좀 있으면 비행기 타고, 선물 잔뜩 갖고 올 거야."


며칠 전 주말에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갔을 때 유난히 말이 많아지는 아내의 모습에서 그 옛날 아빠 없는 아이로 놀림을 받던 그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이 없을 때엔 거리를 두고 걷다가도 주변에 사람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보란 듯이 '나도 신랑 있거든. 나 이혼녀도 아니고 혼자서만 딸 키우는 것도 아니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 손을 꼭 잡는 아내를 보고 있으려니 미안함이 앞서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행여 내가 없는 늦은 밤이나 새벽에 큰 화재라도 발생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집 주변에서 강력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몇 년 전 건물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꽤 큰 지진이 났을 때도, 아이가 심하게 아팠을 때도 다행히 내가 옆에 있어서 수습이 가능했지만 그런 행운이 언제까지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가 부재중일 때를 대비해 아내와 딸에게 번갈아가며 대피 요령이나 대처 방안을 얘기해주고는 있지만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마음은 늘 집에 가 있다.


언젠가 한 번 딸아이가 공익 제보하듯 엄마가 밤에 잘 때마다 불을 켜고 잔다고 내게 일러바친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아내가 피곤해서 미처 불을 끄지도 못한 채 잠이 든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모르고 다른 세대보다 전기요금이 많이 나온다고 잔소리만 해댔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지금도 아내는 주말만 되면 나를 이끌고 바깥나들이를 하려고 한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눈꺼풀은 내려앉을 정도로 피곤하지만 최근에는 웬만하면 못 이기는 척 그 부탁을 들어준다. 불륜 커플로 오해를 살까 하는 노파심에 비록 지금 현재는 새끼손가락 하나 잡는 것만 허용하고 있지만 좀 더 익숙해지면 아내가 잡을 수 있는 내 손가락 숫자도 점점 늘어날 것으로 본다.


겉으로 보기에 낮에는 홀아비가 살고 밤에는 딸 하나 둔 과부가 사는 집, 창원시 OO아파트 12층에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 하나 분명하게 밝히고 싶은 것은 키 작고 성격 좋지 않은 여자에겐 남편이 있고 배 나오고 못 생긴 남자에겐 아내가 있으며 그 두 사람이 법으로 맺어진 부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생각보다는 아주 훌륭하게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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