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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un 21. 2022

내 쉴 곳은 어디에

떠나야 할 땐 울지 말고 웃으면서 가는 거야

딸아이 출생과 함께 문을 연 경쟁점은 꼬박 4년을 채우고 폐점했다. 그 사이 또 다른 프랜차이즈 경쟁점이 들어섰다가 얼마 가지 않아 폐점한 것까지 합치면 7년의 시간 동안 경쟁점 3곳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셈이었다. 경쟁점들이 연이어 문을 닫는 동안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지만 '상처뿐인 영광'이란 말을 증명하듯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빚을 지지 않아 다행이다 싶은 생각에 한시름 놓을 무렵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10년 가까이 말만 무성했던 점포 인근 아파트 단지 2개의 재건축 일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가게 바로 옆에 있던 2단지는 가게를 찾는 주 고객들이 거주하던 곳이었고 그 옆 1단지는 우리가 거주하던 곳이었기에 생업과 주거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이중고에 부딪힌 것이었다. 언젠가는 해결할 문제였기에 조금이라도 준비된 상태에서 맞기를 기도했지만 무심한 하늘은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숨통이 트일 때마다 발목을 잡은 경쟁점들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일단은 집 문제 해결이 시급했다. 이전에 살던 전세금으로는 집을 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주변 전월세 가격은 폭등했고 그마저도 전세 매물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집주인들은 급증한 수요에 발맞춰 경쟁하듯 월세를 올려 부르기 시작했다. 기세가 꺾이길 기대하며 기다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결국 아내와 상의 끝에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사기로 결정했다. 2년마다 돌아오는 재계약 여부에 대한 걱정과 이사할 때마다 드는 번거로움까지 고려하면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가진 돈이라고 해봤자 계약금과 중도금 일부를 낼 정도밖에 없었고 대출 원리금에 대한 부담이 컸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0년 가까이 살았던 88년식 5층짜리 아파트 사진 출처 : 네이버 카페 창원 이야기
이주가 완료된 동은 유령 건물이 되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카페 창원 이야기


딸아이가 2년간 다녔던 유치원도 폐허처럼 변하고. 사진 출처 : 네이버 카페 창원 이야기


그렇게 이사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이웃들이 하나둘 이주를 시작하며 집 주변은 시간이 갈수록 폐허처럼 변해갔다. 밤늦게 퇴근하는 아내가 집에 들어가는 길이 무섭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집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약기간이 남은 상황이라 자칫 일이 꼬이기라도 했다가는 계약금만 날리고 오도 가도 못할 처지에 놓일 수도 있는 일이라 하루라도 더 살면서 집주인의 결정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집주인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계약 만료 기간을 3개월 앞둔 여름쯤 이루어진 통화에서 집주인은 전세금 걱정하지 말고 어서 집을 구하라고 했다. 어린 딸을 둔 내 처지와 시시각각 폐허로 변해가는 주변 환경을 고려한 배려였다. 사정이 그러면 진작 말하지 왜 미련하게 기다렸냐는 집주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족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따뜻한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집도 비교적 순조롭게 구할 수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이긴 해도 내부 리모델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평수의 아파트였다. 은행에서 대출 상담을 받고 서류 심사를 통과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 후로는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해 가을, 우리는 단지 내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집을 비우고 나왔다. 같은 동에 사는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버텨야 했던 그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외로움과 공포 속에서 참고 기다려준 아내와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제일 컸다. 


이사 당일 집주인은 회사에 반차를 내고 우리를 찾아왔다. 다른 세입자가 들어올 것도 아니고 어차피 곧 철거될 집을 보러 온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집주인은 한동안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내게 말을 했다.

"낡은 집에서 사느라 고생했지요? 별 탈 없이 살아주셔서 감사하고..... 이 집이 우리 부부가 처음 매매한 집이었어요. 여기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다시피 했고 애들도 다 키웠고, 그래서 참 애착이 많이 갑니다. 처음 계약하던 날 내가 한 얘기 기억해요?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 모두 집 사서 나갔다고 했던 말. 우리 사장님이 그 기록 끝까지 지켜주셨네. 허허허"


그러고 보니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그날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그때만 해도 무슨 미신 같은 말을 하나 싶었는데 빚을 지든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집을 산 게 맞으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싶었다. 얼마 후 모든 짐이 차에 실리고 빈 집에서 집주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서로가 서로에게 덕담을 주고받은 후 집주인은 업무상 은행에 방문한 김에 전세금을 송금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집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 혼자 남아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니 지난 세월이 영화 속 장면처럼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가진 돈 하나 없이 카드 대출까지 받아가며 장사를 시작했던 일, 두 사람이 모은 돈 3천만 원에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2천만 원을 보태 발품 팔아 겨우 집을 구했던 일, 그 와중에 태어난 딸아이까지 그 모든 일들이 추억처럼 차곡차곡 쌓인 곳이었다. 막상 그곳을 떠나려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을 나서는 길에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준다'는 말을 떠올렸다. 처음 문제에 직면했을 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었다.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한계에 부딪힐 때쯤이면 기적처럼 돌파구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보고 사람이 그냥 죽으란 법은 없음을 실감했다. 막막하기만 했던 그때의 경험을 통해 우리 부부는 조금 더 단단해졌고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주거 문제를 마무리 짓고 한숨 돌리긴 했지만 우리에겐 또 하나의 과제가 남아 있었다. 한결같이 우리 점포를 찾아주다가 대규모 이주와 함께 한꺼번에 빠져나간 그 고객들의 공백을 어찌 메울 것이고 재건축이 끝나고 새로 입주하게 되기까지 3년이란 긴 시간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메인사진 출처 : 본인 촬영, 지금은 사라진 내가 살던 아파트(사진 우측 숲 바로 옆 낮은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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