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Jun 27. 2022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면 되는데

그 말 하기가 그렇게 어렵니?

몇 번 언급한 적 있듯이 내 어머니는 거의 맥가이버 같은 삶을 사셨다. 폭우 때문에 배수구가 막혀 물이 잘 내려가지 않을 때도, 오래된 벽지를 바꾸는 도배 작업도, 심지어 시멘트를 사 와서 마당 미장을 하는 작업까지 어머니 혼자서 해결하셨다. 물론 보통의 어머니들이 다 하는 그런 일들까지 당연히 어머니 몫이었다.


밖에 나가서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조금 무심한 성격인 것도 있지만 웬만한 일은 스스로 다 해결하시는 어머니 덕분에 나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을 때까지 세상 모든 여자는 다 그런 줄 알았다. 아니, 적어도 살아가는 데 있어 최소한의 기본적인 센스는 갖고 있는 줄 알았다. 그건 완벽한 나의 착각이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지금의 아내를 첫 여자로 만나고서야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사람마다 각자 나름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아내가 가진 특기나 장점들은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 많다. 히든싱어에 나온 가수의 목소리를 귀신같이 잡아낸다든가 너목보에서 음치냐 아니냐를 기막히게 가려내는 재주처럼 실생활과는 무관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아내는 정작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알아야 할 것들이나 알아두면 좋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일자무식인 경우가 많다.


이 또한 욕심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적어도 그런 면에서 아내는 낙제점에 가깝다. 오로지 남편 바라기로 사는 그런 아내를 볼 때마다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곤 한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딸아이가 온라인 수업을 할 때의 일이다. 수업 중인 딸아이가 방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형광등을 사서 교체했는데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3개짜리 등으로 구성된 실내등이 동시에 안 들어올 때 어느 정도 예감을 했지만 아무래도 안정기 수명이 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됐어? 불 안 들어와?"

"등이 문제가 아니고 안정기가 다 된 것 같아. 저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안정기가 뭔데?"

"설명하자면 길어. 확실한 건 업자를 불러서 해결하든가 아니면 날 잡아서 내가 직접 공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안정기 : 기기의 동작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회로 소자의 하나. 형광등 따위의 전등에 시동 전압을 준다든가 전류를 제한하는 데에 쓴다.


다음날 아이가 학원에 가고 아내가 출근을 한 틈을 타서 빛의 속도로 작업을 했다. 어차피 있어 봤자 두 사람 모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혼자 하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숙원사업처럼 생각했던 LED로 집안의 조명을 다 바꾸는 작업을 혼자 한다는 것은 예상보다 힘든 일이었다. 


저 조그마한 쇳덩이가 어찌나 무겁던지 ㅠㅠ


약 두 시간의 사투 끝에 아이 방과 현관등, 거실등을 LED 등으로 교체했다. 온몸에 땀과 먼지가 범벅이 된 채 스위치를 켰을 때 환하게 들어오는 불빛에 나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워 아내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당신은 좋겠어? 이렇게 능력이 뛰어난 남자를 남편으로 둬서."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원래 그런 거는 남자가 다 하는 거 아닌가? 당연한 걸 해놓고 생색 내기는"


한순간 갈등을 했다. 이걸 냅다 받아칠 것인가 그냥 참을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다. 소모적인 입씨름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유독 두 개의 단어가 한동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원래.... 남자가....' 


집안일을 할 때마다 남녀 구분이 없다고 줄기차게 주장을 하던 아내였다. 밥을 차릴 때도, 청소를 할 때도, 빨래를 널 때도 늘 같은 말을 반복했었다. 그럴 때 거실에 누워 있기라도 했다가는 돌고래 뺨치는 고주파 잔소리를 늘어놓던 아내였다. "야~!!! 내가 너거들 시녀야? 하녀야? 당장 안 일어날래?" 그런 상황에서 내가 "원래 그런 건 당연히 여자가 하는 거 아니었어?"라는 말을 내뱉었다가는 아마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억울한 마음에 이 이야기를 지인들(어쩌다 보니 죄다 여자였다)에게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아내 편을 들었다. 전기에 관련된 작업은 원래 남자가 하는 게 맞다고. 나도 그건 인정한다. 가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분야에서 특기를 발휘하는 여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이고 배관이나 전기 쪽 일들은 남자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럴 때 여자는 무심하게 뒷짐 지고 가만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최악의 경우 뭘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를 때엔 일을 마친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실등이 난이도 최상인데 그것까지 해내셨으니
다른 등은 쉽게 교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그날 밤 올린 리뷰에 판매업자가 장문의 답글을 달아주었다. 역시 전문가의 소견(?)은 남달랐다. 내가 고생 고생한 과정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공감 가득 답글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런 말을 아내가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기 공사하는 것을 콘센트에 플러그 잠깐 뺐다가 꽂는 것처럼 쉽고 간단하게 생각하는 무지는 그렇다 치고 왜 모든 것을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인지.


가사노동을 포함해서 부부간의 일에 당연한 건 없어야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불행은 시작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아내는 시도 때도 없이 '당연히....'를 외친다. 가끔은 80년대 반공 표어에서나 쓰일 법한 기적의 논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내 할 일은 나눠서, 네 할 일은 너 혼자'


"이 사람아, 다 좋은데 딸이 당신 보고 그대로 배울까 봐 그게 걱정이다."

내가 점점 백발노인이 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