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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ul 14. 2022

"제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이제까지 속으신 겁니다

본 글은 1%의 실화와 99%의 허구로 창작되었으며 본문에 사용된 인명, 지명, 단체명을 포함한 어떤 명칭도 실제와 관련이 전혀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내 그릇의 크기를 알았어야 했다. 가진 능력에 비해 과도한 사랑과 관심을 받은 것이 문제였다. 구독자 수가 1,000명을 돌파한 이후부터 난 내 글을 쓰지 못했다. 수시로 달리는 댓글들을 실시간으로 체크하면서부터 나는 내가 쓰고자 하는 글보다는 사람들 입맛에 맞는 글을 쓰게 되었다. 구독자들은 새 글이 올라올 때마다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찬양 댓글을 쏟아부었고 나는 거기에 취해 또다시 폭주를 했다.


이에 발맞춰 출판사에선 경쟁하듯 출간제의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고 국내 최고 출판사인 '만우스'는 아예 백지수표를 위임하며 향후 20년간 10편의 글을 독점 계약하고 싶다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불행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그때 모든 것을 멈추고 나를 되돌아봤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달렸다.


부란치에서의 인기를 발판 삼아 출간한 에세이 <나는 해맑은 이여사의 종입니다. 딸랑딸랑>이 누적 판매 부수 50만을 넘기자 어느새 내겐 '시대가 요구하는 남성상', '올해의 자랑스러운 남편상 후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이후 국내 유일 남성 작가들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남북 문학상에서 <북벌, 이루지 못한 꿈>이란 소설로 대상까지 수상하자 우리 부부를 섭외하려는 방송사간의 치열한 경쟁이 이어졌고 러시아의 유명한 평론가인 Vladimir Faust  씨는 나를 일컬어 '동방의 톨스토이'라 칭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깊어가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지만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일부 여성팬들이 아내를 향해 악성 댓글을 달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내의 SNS 주소를 추적해 온갖 욕설을 퍼붓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중 몇몇은 지나간 과거 사진들을 캡처해서 악의적으로 편집한 후 잘 나가는 남편에 빌붙어 명품백이나 옷으로 치장하는 여자라고 아내를 매도하며 이혼을 요구하는 이도 있었다.


아내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참고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으나 냄비근성으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성향을 볼 때 금방 사그라들 것이라 판단하고 일체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출판사가 전면에 나서 물량공세에 가까운 이벤트로 이슈몰이를 했고 극성팬들 또한 나를 대신해 댓글 전쟁을 벌였다.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되자 아내도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상황이 반전 국면을 맞은 것은 이틀 전 있었던 아내의 기자회견 이후부터였다.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기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나는 부랴부랴 켠 TV 속에서 아내가 기자 회견하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아내는 미리 작성한 회견문을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이제까지 내가 쌓아온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한 '1등 남편'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뒤엎는 폭로였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아내는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상춘 일보> 성유정 기자입니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아르웬 작가에 대한 가스 라이팅과 커피 셔틀은 없었다는 것인데 단 한차례도 없었다는 뜻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남편은 항상 자신이 마시다가 남긴 커피를 선심 쓰듯 제게 건넸습니다. 그걸 셔틀이라고 하진 않겠지요. 제가 남편을 위해 하칠동 커피 1.1리터짜리 병을 사서 갖다 바치는 날이 훨씬 많았고 가스 라이팅은 오히려 남편이 더 심하게 했습니다.”


“<월간 지혜로운 부부생활>의 이시내 기자입니다. 남편분께서 ‘아주부’라는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주방일을 포함한 가사 노동 대부분을 하셨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꽤 가정적인 남자로 알려졌는데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보는 눈이 있을 때만 그렇게 연기를 했을 뿐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재활용 쓰레기가 너무 많아 엘리베이터에서 힘들어하는 저를 도운 옆집 남자 얘기를 꺼냈다가 어떤 관계냐고 추궁을 하며 폭력을 휘두른 적도 있습니다.”


몇 차례 더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간 이후 아내는 자신의 말을 입증할 수 있는 녹취록이라며 USB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살면서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모습의 아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날 저녁 개설된 [아.진.요](아르웬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네입어 카페는 불과 1시간 만에 10,000명 넘는 사람이 가입을 할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샀고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돌변했다. 전화기에 저장된 목록을 수없이 반복해서 돌려봤지만 마땅히 연락할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 끝에 친하다 생각했던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내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몇몇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남겼다. 첫 인터뷰를 해줬던 <장훈 신문> 김장준 기자에겐 그동안 고마웠다는 짤막한 인사를 남겼다. 출판사에서 인연을 맺은 차윤경 작가에겐 남편이 쓴 곡에 작사를 해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북벌, 이루지 못한 꿈>을 쓰기 위한 자료조사 차 비무장 지대를 방문했을 때 도움을 줬던 유병국 소령에겐 나처럼 살지 말고 영원히 아내를 사랑해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인사를 남긴 후 서랍 속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알약을 꺼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점점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 휴대폰 화면에 김장준 기자의 메시지가 도착한 게 어렴풋이 보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다음에 술이나 한 잔 하자. 할 얘기가 많아. 아무래도 네 와이프 기자 회견 배후에 진시아 작가가 있는 거 같아. 그 여자, 예전에 어느 프로그램에서 너랑 제대로 한 판 했잖아. 아무튼 마음 잘 추스르고 다음에 시간 내서 한 번 보자."



"아저씨!!! 얼른 일어나. 출근 준비해야지."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보니 츄리닝 차림의 아내가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발로 툭툭 차고 있다.

'아, 꿈이었구나.'

꿈 치고는 지독한 악몽이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수건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전투처럼 치러진 출근 준비를 끝내고 문을 나서며 아내에게 물었다.

"내가 낮에 부탁한 거는?"

"자느라 못 봤구나? 카톡으로 보냈는데."


뭐라고 썼을까 궁금한 마음에 출근길 차 안에서 서둘러 카톡을 열었다. 오후에 받은 단 두 줄의 글뿐 아무 것도 들어온 것은 없었다. 아내다운 단순 명료한 글을 보자 또다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기 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겨우 이것뿐이야? 하긴 나한테 폭로할 게 있기나 하겠어?"


"그럼~~ 당신에게 폭로할 단점이나 약점이 있기나 해? 내겐 언제나 완벽한 남자인데.... 뭐.... 좀 못 생기고 제대로 돈 못 벌고 배가 살짝 심하게 나왔고 씻는 거 귀찮아하고 성질이 약간 더러운 걸 빼면 당신은 완벽한 사람이잖아."

매사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아내의 대답을 듣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꿈속의 아내와 현실 속 아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그래도 꿈속의 아내는 폭로 이전까지는 말 잘 듣는 참 착하고 괜찮은 여자였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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