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Jul 07. 2022

아픈 기억만 남은 첫 경험

그날 죽었더라면 하지 못했을 경험

"아..... 아프다고. 억지로 넣지 말라고."

"처음이라 그렇다고 브라운 아이즈가 그랬잖아. 한 번도 안 해봐서 그런 거야. 조금만 참아 봐."

"참아서 될 일이 아니라니깐. 그만... 그만 넣어."

"애도 아니고 왜 이렇게 징징거려? 오일 같은 거라도 발라야 하나?"

"이건 뭘 발라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애당초 크기가 안 맞아. 더는 안 들어갈 것 같아. 그냥 빼면 안 될까?"

"아 진짜. 내가 다시는 해주나 봐라. 앞으로는 혼자서 하든가 알아서 해."


그날 밤 해프닝은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 채 그렇게 끝이 났다. 기대가 컸던 나는 몸에 상처(?)를 입었고, 상대적으로 나보다 경험이 많았던 그녀(현 아내)는 그녀대로 나름 핑크빛 상상을 하며 준비했던 이벤트가 물거품이 된 것에 대해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우와~~ 진짜 아파 죽는 줄 알았네."

"엄살 떨기는. 니 이런 거 처음 해보재?"

"이건 처음이지만 이보다 더 죽을 뻔했던 적은 한 번 있었지."

"뭐라고? 어떤 년이야? 당장 말해."

가까스로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나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섰던 그날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96년 광복절 오후였다. 손자가 보고 싶다는 부모님을 모시고 큰 형님 내외가 사는 대전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금강 휴게소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추풍령을 넘어서는데 한순간에 차가 기우뚱하더니 급격히 중앙분리대 쪽으로 쏠렸다. 운전하시던 아버지께선 충돌을 피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차례 중앙분리대에 부딪힌 차량은 그 충격으로 빙글빙글 돌며 반대쪽 가드레일로 향했다.


가드레일 너머는 험하기로 유명한 추풍령 고개, 천 길 낭떠러지였다. '아.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동안 살아온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지난 세월이 영화 필름 돌아가듯 흐른다더니 그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길어봤자 5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20년 넘게 살아온 인생의 수많은 장면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과는 달리 마치 슬로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눈앞의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지며 차량이 추풍령 고개 쪽으로 향하는 찰나, 2차선을 달리던 15톤 트럭이 기적처럼 우리 차를 들이받았다.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려오던 대형 차량에 부딪힌 우리 차는 다시 중앙분리대 쪽으로 향했고 몇 차례 더 충돌을 한 후 멈췄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운전석에 계신 아버지부터 살폈다. 눈에 띌 정도의 큰 외상이 없는 걸 확인한 후 바로 뒷자리에 계신 어머니를 보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붉은색 페인트 한 통을 들이부은 것처럼 얼굴 전체가 피로 뒤덮여 있었고 흰색 블라우스는 절반 이상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양의 피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고. 너거 아버지 챙기거라. 너거 아버지는 괜찮나? 니는? 니는 다친 데 없나?"

흘러내리는 피로 눈을 뜰 수 없었던 어머니께선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와 나를 챙기셨다.

"지금 우리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잠깐만 말하지 말고 있어 봐요. 별 일 아닐 거야. 괜찮아요 괜찮아."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했지만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는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행여 어머니께서 거울이라도 봤다가는 정신을 잃으실 게 분명했기에 서둘러 티슈를 꺼내 미친 듯이 피를 닦았다.


티슈 한 통을 거의 다 쓸 정도로 많은 피를 닦아내자 상처의 윤곽이 드러났다. 다행히 이마 부위에 약 3cm 정도 찢어진 상처를 제외하곤 출혈이 없었다. 티슈를 여러 겹 접어 어머니 이마에 누른 채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천만다행으로 우측 뒷문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열렸다.


내려서 바라본 현장은 처참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진 차체와 충격으로 인한 파편들이 도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2차 사고를 막기 위해 일정 거리를 두고 삼각대를 설치했고 지나가는 차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사고 수습을 도왔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였지만 누군가는 119에 신고를 하고 몇몇 사람들은 원활한 차량 흐름을 위해 교통정리를 했다. 타이어 4개가 모두 터져 특수 견인차가 와야 했던 것을 제외하고 사고 수습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구급차에 탄 나는 김천의 어느 병원으로 향했고 아버지께서는 사고 진술을 위해 경찰서로 가셨다.


다행히 어머니께선 여러 가지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으셨다. 충격으로 인한 약간의 두통과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봉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열상(裂傷)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괜찮으셨다. 경찰서에 다녀오신 아버지께 어머니를 모시고 먼저 집으로 가시라 한 후 나는 보험업무와 진료비 정산을 위해 병원에 남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대기실 의자에 앉자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그제야 몸 여기저기 통증이 느껴졌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경험 덕분에 나는 장거리 운전을 하거나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면 반드시 타이어 공기압 체크를 한다. 특히 여름이나 겨울처럼 공기압을 달리 해야 할 때를 대비해 트렁크 안에 항상 차량용 컴프레셔가 장착된 타이어 공기주입기를 넣고 다닌다. 뿐만 아니라 운전을 할 때면 시선이 전방에만 머물지 않고 수시로 전후좌우를 다 살피는 편이다.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현재 기준)이었던 그 사고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찰나의 순간, 생과 사의 기로에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에 나는 이후의 삶에 있어 매사 진심으로 최선을 다 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잘 들었지?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난 덕분에 네가 날 만날 수 있었던 거야. 영광인 줄 알아."

"헛소리 그만하고, 우리 아까 하던 거 다시 한번 도전해보면 안 될까?"

죽다가 살아난 심각한 얘기를 제대로 듣기나 한 것인지 그녀는 갑자기 음흉한 미소와 함께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날 밤 나는 행여나 아내가 또다시 만행을 저지를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고 상가가 영업을 시작할 무렵 빛의 속도로 달려간 나는 결국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한 치수 더 큰 반지로 바꿨다. 2003년 봄 어느 늦은 밤, 머리털 나고 처음 경험했던 커플링의 추억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고통'이란 단어로 남아 있다. 맞지도 않은 반지를 억지로 끼워 넣으며 내게 고통을 안겨준 아내 덕분에 내 손가락엔 아직까지 흉터가 남아 있다.


최근 들어 아내는 딸아이와 커플링(?)을 맞췄다. 그걸 보며 왜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이의를 제기했으나 돌아오는 아내의 대답은 내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니는 목걸이를 해주고 싶어도 모가지가 굵어서 금값 많이 나오지, 반지를 해주려고 해도 손가락이 굵어서 금값 많이 나오잖아.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살아라. 그게 우리 가족 살리는 길이다."


 나는 정작 남자로서 굵어야  그것(이상한 상상 하지 마라.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목소리다) 굵지 않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손가락과 모가지만 굵은 것일까. 노천명 시인은 <사슴>이란 시에서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 사슴 이랬는데 모가지가 굵어 슬픈 아르웬은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나도 죽기 전에 금으로 치장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단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