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Aug 04. 2022

솜사탕을 사랑한 소년은 훗날...

구름 과자에 빠져 사는 중년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과는 달리 어린 시절엔 달콤달달(브런치 작가명 아님 주의)한 것을 좋아했다. 과일을 먹을 때도 종류에 상관없이 설탕에 찍어 먹었고 미숫가루를 타 먹어도 설탕과 미숫가루를 거의 1:1 비율로 맞춰서 타 먹을 정도로 단맛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단 것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설탕과자(정확한 명칭은 아직도 모르겠다. 아래 사진 참고)와 솜사탕을 좋아했다.

 네이버 블로거 '성불하세요' 님의 <한걸음 더 높이 뛰자> 블로그 사진 캡처


지금은 유원지나 관광지가 아니면 쉽게 볼 수 없지만 그 당시 10원에 한 판을 할 수 있는 <뽑기>와 개당 50원 하던 솜사탕은 학교 앞이나 아이들이 모이는 놀이터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놀이이자 먹거리였다. 각자 주머니 사정에 따라 상대적으로 가난한 아이들은 뽑기를 하고 부유한 아이들은 솜사탕을 먹는 게 하굣길의 흔한 풍경이었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늘 친구들이 하는 것을 구경하며 부러워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이른 새벽 출근하시는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는데 어머니와 형들이 들어가길 기다린 아버지께서 아무도 모르게 내 손에 거금 150원을 쥐어 주시는 게 아닌가.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아버지께서 그러셨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그 정도 금액이면 친구들과 군것질 파티를 하고도 남을 만큼의 거액이었다. 그때부터 머릿속에 있는 천사와 악마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학교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돈이 없어 평소 사 먹기 힘들었던 솜사탕 하나를 사고 나머지 100원은 저축하는 것과 기존에 갖고 있던 20원으로 뽑기를 두 판 한 다음 아버지로부터 받은 150원은 저금통에 넣는 것, 이 두 가지 시나리오로 마지막까지 고심한 끝에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설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그래, 결심했어. 이런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솜사탕을 먹어 보겠어? 솜사탕 하나 사서 친구들 앞에서 어깨 제대로 펴고 남는 돈은 저금통에 넣는 거야.'

각오를 다지며 학교 앞 노점상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뛰어갔더니 한 아이가 자기 몸뚱이만 한 독수리 과자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눈이 돌아갔다. 솜사탕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지고 커다란 독수리만이 내 눈에 들어왔다. 도박에 빠져 전 재산을 탕진하는 노름꾼처럼 쉴 새 없이 뽑고 또 뽑았다. 주변에 있던 친구들도 어느새 하나가 되어 악마의 속삭임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르.웬.은.할.수.있.다.'


냉정을 찾았어야 했는데 10살짜리 꼬꼬마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법, 마침내 마지막 17번째 동전을 노점상 아저씨에게 건네고 영혼을 끌어 모아 번호표를 뽑았다. 그리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동서고금을 막론해 역사상 처음 있을 법한 16전 17기의 도전 끝에 독수리를 쟁취한 것이었다. 160원을 쓰는 동안 받았던 피라미급 작은 상품들을 친구들에게 뿌리며 영웅 취급을 받은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집으로 향했다.


대문을 열고 4전 5기의 신화를 창조했던 복싱 선수 홍수환처럼 "엄마~~ 나 독수리 먹었어."라며 개선장군 흉내를 내는 나와 달리 독수리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홍수환 선수 어머니처럼 "대한국민 만세다."라는 멘트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적어도 "우리 아들 장하다."라는 말은 해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대신 나지막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래서? 돈 얼마 썼는데?"


그때라도 분위기를 파악하고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될 것을 나는 순진하게 사실 그대로를 다 말하고 말았다. 미처 170원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작된 '매 타작'은 그날 해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무기(?)로 사용하던 플라스틱 빗자루 두 개가 박살이 나고 어머니 체력의 한계가 없었다면 매질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 이후로 설탕과자와 솜사탕은 내게 금기어가 되었다. 나이를 먹으며 입맛이 변하기도 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런 먹거리가 점점 사라진 것도 주요인이 되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날 죽을 만큼 맞았던 그 기억 때문에 애써 멀리한 결과였다.


그 후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내가 솜사탕을 다시 떠올린 것은 한창 사진에 빠져 살던 무렵, 동호회 회원 한 분이 어느 여름날 목화밭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봤을 때였다. "팝콘과 솜사탕"이란 제목에 걸맞게 정확히 절반으로 나눠진 앵글 아래쪽에는 만개한 목화꽃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팝콘처럼 자리 잡았고 상단에는 솜사탕 같은 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보기 드문 작품을 본 순간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구름 사진에 빠져 들었다.


그날부터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구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특히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순백의 구름이 자주 보이는 여름에서 초가을 무렵까지는 거의 매일 하늘만 보고 살다시피 했다. 차 트렁크 안에 늘 카메라를 넣어 다녔고 퇴근길에 구름 모양이 괜찮다 싶으면 혼자서 훌쩍 길을 나서기도 했다. 


철이 없어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 돌이켜보면 오히려 그때가 지금보다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 더 힘들었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던 시기였지만 그래도 그때는 하늘 한 번 올려다볼 마음의 여유라도 있었다.


좌측부터 진해 내수면 연구소 반영, 부산 오륙도, 부산 누리마루에서 바라본 광안대교
좌측부터 함안 말이산 고분군 가는 길, 함안 말이산 고분, 함안 박물관 (HDR 기법 이용)


나이를 먹고 어느덧 중년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게 된 지금은 그런 여유가 사라졌다. 정작 늘어야 할 것은 재산인데 나이가 들고 실제 늘어나는 것은 한숨과 뱃살과 걱정뿐이라더니 내가 꼭 그 꼴이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걱정이 많은 것인지 그럴 때마다 습관적으로 구름 과자를 찾곤 한다.


딸아이 성적이 신통치 않아 한 대, 마누라가 애를 먹여서 한 대, 진상 손님이 왔다 가면 화를 다스리느라 한 대, 졸음이 몰려와서 한 대, 글이 써지지 않아 한 대, 이렇게 갖은 핑계를 대며 피워대는 구름 과자의 늪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을 해야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솜사탕을 좋아했던 소년, 구름에 미쳐 날뛰던 30대 젊은이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구름 과자 하나에 온갖 시름을 다 잊고 사는 중년의 아저씨만 남은 이 현실이 그저 슬플 따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