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Oct 06. 2022

열아홉 아르웬에게

쉰 하고도 둘을 더 먹은 아르웬이

열아홉 아르웬 안녕? 많이 놀랐지? 나는 정확히 33년 후의 아르웬이야. 비록 노안이 와서 폰 설정을 큰 글씨로 하고 5분 이상 걷지 못하는 저질 체력의 0.1톤 하마가 되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 비교적 멀쩡하게 살고 있어. 아, 너는 폰이 뭔지 모르겠구나. 먼 미래에는 말이야 개나 소나 휴대전화기를 들고 다녀.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고 갑자기 네 생각이 나는 일이 생겨서 이렇게 몇 자 적어.


얼마 전 딸아이가 중간고사를 치고 집에 오자마자 펑펑 울었거든. 뭐라고? 결혼을 하고 딸까지 낳은 게 신기하다고? 행여 딸이 날 닮았을까 걱정이라고?? 걱정 마. 적어도 외모만큼은 마누라와 나의 장점만 뽑아서 아주 훌륭한 비주얼을 타고 태어났어. 아 그리고 중요한 얘기 하려는데 말 좀 끊지 마. 내가 요즘 건망증이 좀 심해져서 흐름이 끊기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날 딸아이가 비율을 구하는 수학 주관식 문제를 풀었는데 풀이과정까지 다 맞히고도 답을 2:1로 썼다지 뭐야. 정답은 1:2였는데 잠시 착각을 해서 거꾸로 쓴 거지. 4점짜리 문제인데 과정이 맞았으니 2점이라도 주면 좋겠다는 딸아이에게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말해줬어. 냉정할 수밖에 없지만 정확성을 요구하는 수학에서 그런 융통성은 발휘되지 않는 게 맞잖아. 실망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딸아이를 보니 문득 1989년 12월 15일 밤 네가 생각나더라고.


공부는 못했어도 나름 모범생이었던 너는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하향 지원을 했었지. 지금 입시제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선지원 후시험이라는 도 아니면 모 식의 한 판 승부에서 모험 대신 안정을 선택한 네가 너무 대견하기까지 해.


그런데 너는 그날 시험을 아주 끝내주게 망쳐버렸지. 어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싸 주신 도시락도 먹지 않고 점심시간 내내 정리노트를 보던 너는 마지막 4교시 시험에서 일생일대의 최대 실수를 하고 말았잖아. 원래부터 암기 과목이 약하던 네겐 아마 그 시간이 제일 힘들었을 거야. 게다가 감독관마저 잘못 만나 행여 커닝으로 오해를 살까 하는 노파심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조심스럽던 너는 생물 주관식 1번과 3번의 답안을 바꿔서 적는 실수를 하게 되지.


그 실수만 아니었어도 아마 그날 밤 너는 행복에 겨워하며 꿀잠을 잤을 거야. 집에 올 때까지도 몰랐던 너는 TV에서 하는 정답 채점을 본 후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을 하고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했었지. 딸아이가 우는 모습과 그날 네 얼굴이 살짝 겹쳐졌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란 거 잘 알아. 그런데 말이야. 지나고 보니 그거 정말 별 거 아니더라.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위기와 난관들이 수시로 발생해. 다 필요 없고 시험 결과가 궁금하다고?


결과부터 말하자면 너는 1월 20일쯤 학교에 가서 합격증을 받아. 그날 너는 그 기쁨으로 인해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되어 학교 앞 <승리 오락실>에서 엄청난 초능력을 발휘하며 네 테트리스 인생 최고의 점수를 기록하지. 그때 깨달았어. 긍정의 힘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학교생활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딱히 문제 될 만한 일들은 없었어. 1학년 1학기 때 겁도 없이 영어교육과 4학년들이 수강하는 TOEFL을 수강 신청했다가 F를 한 번 맞는 것 외엔 성적도 무난한 편이었고. 그렇다고 성적이 좋았다는 건 아니야. 넌 4년 내내 장학금 전액 면제를 받고 다녔으니까.


여자?? 음..... 글쎄. 복학하고 한 명 있긴 했는데 웬만하면 그 여자는 안 만났으면 좋겠어. 너 어장관리 당해. 돌고 돌다 다시 너한테 추파를 던지는데 그때 네가 아주 훌륭한 결정을 내리지. 일어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자리를 나와 버려. 그냥 그 정도만 알고 있어.


그 외 궁금한 게 많겠지만 미리 결과를 아는 것보다는 직접 부딪혀서 경험하며 이겨내는 네가 되었으면 해. 많이 답답하고 외롭고 힘들겠지만 그게 맞는 것 같아.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네가 90년 3월에 가입하는 그 동아리에 너무 '몰빵'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뭐 하나 꽂히면 정신줄 놓는 그 성격은 잘 알지만 적당히 즐기며 학과 생활에도 비중을 뒀으면 해. 네가 졸업할 무렵인 1997년엔 대한민국이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지니까 그에 대한 대비도 미리 좀 해두고.


30년 넘는 시간을 살아보니 그렇더라. 당장 뭐라도 이룬 것처럼 느껴지는 좋은 일도 생기고 그와 반대로 이겨내기 힘든 시련들도 많더라고.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게 한낱 순간일 뿐이고 과정일 뿐이었는데 그 당시엔 그걸 몰랐어. 기쁨에 겨워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했고 내일모레 죽을 사람처럼 의기소침하기도 했지. 그런 면에서 감정의 기복이 심한 네가 걱정이 되기도 해. 그래도 다행히 이렇게 잘 살아남아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 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이제 슬슬 마무리할 시간이네. 이번 기회에 오랜만에 오래전 나를 떠올려서 좋았고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어떤 인생을 그려볼까 상상을 해보기도 했어. 다시 말하지만 인생을 좀 더 길게 바라보고 넓은 시야를 갖고 살아가길 바라. 가능하면 술 먹는 돈 아껴서 젊을 때 해외여행도 다녀 보고. 지금 생각하니 그게 제일 후회가 되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지만 그때 다시 또 얘기 나누는 걸로 하고 오늘은 이만 줄일게.


아,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너 나중에 '브런치 작가'라는 거 도전하는데 세 번 떨어진다. 혹시나 충격 먹을까 봐 미리 천기누설하는 거야. 그러니 글 좀 쓴다고 어깨에 뽕 넣고 다니지 마. 그래서 어떻게 되냐고? 그건 일단 세 번 떨어진 후 네 결정에 달렸겠지. 인생이란 게 그런 거거든. 그대로 주저앉느냐, 다시 일어서느냐 끊임없는 판단과 선택의 연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