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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Oct 20. 2022

내가 마!! 한 때는 이런 쏴람이었쓰

지금은 아닙니다만

201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결과는~~~~ 60초 뒤에'라는 시청자 농락 성 멘트가 히트 아닌 히트를 친 프로그램 슈퍼스타 K가 시즌을 거듭하며 방송되었던 그때, 지금은 방송계에서 영원히 퇴출된(것으로 보이는) 정 땡땡을 포함하여 로이 킴, 장재인, 김지수 등 기타 하나 달랑 메고 나와 무대를 주름잡던 그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 내게는 '애증'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인 기타, 그 기타를 다시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그 무렵이었다.


내가 처음 기타에 관심을 둔 것은 1987년 고1 때였다. 어느 드라마에서 무명 가수가 기타를 치며 이문세의 '소녀'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마침 같은 반 친구 중에 기타 학원에 다니는 친구가 있어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타 앓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학력고사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힌 예비 수험생 신분 때문에 그 관심은 3년간 자연스럽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그와 동시에 기타에 대한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도 점점 식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운명의 그날, 대학 입학과 함께 놀 궁리만 하던 어느 날 동아리 가두 모집을 하는 현장에서 나는 내 인생이 바뀌는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된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은 바둑 동아리였다. 그전부터 바둑을 배우고 싶던 차에 무거운 몸 이끌고 찾아갔으나 이 양반들이 애써 찾아간 신입생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기네들 바둑 두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닌가.


여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나는 그 자리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기타 선율이 들려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돌아보니 건너편 테이블에 어떤 남자가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선배는 고등학교 때 그룹사운드에서 기타를 칠 정도로 이미 고수의 반열에 들어간 분이었다.


그런 실력자의 현란한 기타 애드리브에 매료된 나는 그날 당장 입회원서를 쓰고 말았다.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태어나 20년 가까이 금욕에 가까운 바른생활 사나이였던 나는 대학 입학과 함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놀았다. 학교 생활 내내 술과 당구, 기타가 일상의 전부였고 그중에서도 기타가 거의 대부분일 정도로 깊게 빠져 들었다.


한창 미쳐 날뛰던 시절에는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매달렸고 손가락이 너덜너덜해져서 물먹은 휴지처럼 될 때까지 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새벽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치기도 했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 정도로 집착에 가까운 광기를 보였으니 4년 내내 학과 생활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 없었고 졸업 무렵 때마침 불어 닥친 IMF 사태의 직격탄까지 맞은 나는 오랜 백수 생활에 접어들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었지만 어떻게든 핑곗거리와 희생양을 찾아야 했던 나는 그 모든 책임을 기타에 뒤집어 씌우며 내 인생이 꼬인 원인으로 기타를 지목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이도록 기타를 창고에 처박아두고 아예 거들떠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산 세월이 17년이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기타를 손에서 놓았으니 그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살았던 것이다. 원망의 대상이자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한 축을 담당했던 기타, 마치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과도 같은 기타를 마지막으로 한 번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계기가 슈스케였다.


아내에게 동의를 구해 그리 비싸지 않은(하필이면 문제의 그 정 땡땡이 방송에서 쳤던 크래프터 노블 보라색) 기타를 새로 장만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정적이 흐르는 어두운 방 안에서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오랜만에 기타 줄을 튕겼을 때의 그 감정이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 백지장처럼 새하얀 머리와는 달리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이는 신기한 경험 속에 아직 죽지 않았다며 잠시 흥분하기도 했으나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오로지 선배들이 치는 것을 눈팅해가며 주먹구구식으로 배운 나였기에 금세 한계를 보인 것이었다. 서둘러 유튜브에서 관련 자료와 영상들을 찾고 기타 카페에 가입하는 등 디지털 세상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렇게 가입한 기타 카페 생활은 짧지만 강렬했다. 가입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개최된 전국 정모에서 당당히 1등의 영광을 안아 '기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수많은(?) 팬들을 거느리는 속칭 인싸가 되었다.(아래 사진 참고) 어쩌면 내 인생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무대에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한 나는 그 후 기타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시들어가는 현실과 함께 다시 기타를 놓게 되었다.

인간 메트로놈 소리를 들었던 게 엊그제 같건만 (네이버에서 제 닉네임이 포비랍니다)


가장 충격적인 댓글 : 영상과 다르게 배도 적으시고(?) ㅠㅠ


그 후로도 또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처음 기타를 잡았다가 놓은 후 다시 잡기까지 걸린 시간이 17년이었고 다시 놓은 후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여전히 내겐 기타가 애증의 대상이지만 이제는 증오의 감정만큼은 많이 퇴색된 듯하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 맘 때만 되면 학창 시절 콘서트 준비로 여념이 없던 그때가 떠오른다. 가끔은 무대 위의 그 아련한 공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함께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한 때 '플라잉 핑거'라 불리며 무대를 호령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있다. 아니,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기타왕' 칭호를 받던 10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헛된 상상이겠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다. 

'내가 말이지, 지금은 비록 돼지족발 같은 손가락으로 바코드나 찍고 브런치에서 되지도 않을 글을 쓰고 있지만 한 때는 섬섬옥수를 자랑하며 현란한 솜씨로 기타 치던 사람이야. 그러니깐 나 무시하지 마라. 마음만은 아직도 섬섬옥수다.'


<아래 영상은 죽기 전에 꼭 한 번 쳐보고 싶은 프랭크 밀스의 '시인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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