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Oct 27. 2022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아...르...웬.....이제 저승에 갈 시간이다

비록 지금은 돼지족발 같은 손과 곰발바닥, 그리고 10여 년째 만삭의 산모를 능가하는 풍만한 뱃살을 가진 0.1톤 거구의 몸을 자랑하지만 전성기 때만 해도 60k 초반의 날씬한 몸매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당시 별명이 '팔공산 날다람쥐'였을 만큼 날렵함을 뽐내던 내가 단 한 차례 청사에 길이 빛날 삽질을 한 적이 있으니 그것은 ‘응답하라 1994’로 우리 귀에 익숙해진 1994년 초여름의 일이었다.


기말고사를 끝내고 방학의 시작과 함께 동아리 MT에 참석하게 된 나는 선발대 대장(자칭)이 되어 수십 명의 후배들을 이끌고 목적지인 밀양 고사리 분교로 향했다. 해발 1108m 산 중턱에 위치해 ‘하늘 아래 첫 학교’로 불리던 고사리 분교는 내가 입학하기 전부터 오래도록 우리 동아리 MT 장소로 지정되었고 나 또한 신입생 시절 이후 꾸준히 갔던 곳이었기에 꽤나 익숙한 장소였다.


1차 목적지인 표충사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복학하고 처음 참석하는 전 학년 MT인 데다 내 말 한마디가 곧 법이자 명령인 왕놀이에 심취해 텐션이 한껏 오른 내가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낙오되는 여학생이 있을 것에 대비해 조를 편성하고 각 조장들에게 조원들을 잘 챙기라는 지시와 함께 체력이 달리는 후배들을 먼저 올려 보내고 맨 마지막에 남은 나는 일행들을 살피며 뒤따르기로 했다.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온 것이 그때였다. 각자 사정이 있어 그때까지 군대에 가지 않고 있던 91학번 현역 3인방이 슬금슬금 내게 다가와 사뭇 비장한 어조로 내게 애원했다.

“형, 우리 이번이 마지막 MT라요. 여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여기서 시원한 동동주나 한 사발 하고 천천히 올라갑시다. 대학 생활의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해야지.”

결과적으로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지난 4년 동안 수족처럼 나를 따르던 후배들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평소와는 달리 일탈을 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정오쯤 시작된 술자리는 오후 3시가 다 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끝나지 않겠다는 생각에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려 후배들을 설득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후배들에게 먼저 나가서 잠깐 기다리라 말하고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한 나는 미리 화장실도 다녀오고 놔두고 가는 짐은 없나 앉았던 자리를 꼼꼼히 살핀 후 밖으로 나왔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밖에 나와 보니 기다리고 있어야 할 후배들은 나를 버리고 먼저 떠나 버린 뒤였다. 이것들이 의리 없게 자기들끼리 먼저 올라갔다는 생각에 일말의 배신감을 느끼며 산을 오르는데 때마침 하산 중인 등산객들이 보였다. 혹시 조금 전에 이 쪽으로 올라가던 남자 셋을 봤는지, 봤다면 그게 얼마나 됐느냐고 묻는 내 물음에 등산객들은 그런 일행은 본 적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이 바보 같은 놈들이 술김에 다른 길로 올라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행여 사고라도 발생하면 그 책임은 어떻게 질 것인가를 생각하니 술이 확 깼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반대편 길로 내달렸다. 거의 30분 넘게 산악구보에 가까울 정도로 달렸으나 후배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해도 충분히 따라잡고도 남을 시간인데 흔적조차 없다는 것은 나와 길이 엇갈렸거나 애들이 정상 코스로 올라갔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일단 추적을 그만두고 나머지 일행들이 올라간 고사리 분교로 가는 게 옳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당연히 하산한 후 다시 올라야 하는데 취중인 데다가 자주 가봐서 길을 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폭발한 나는 방향만 잡고 산을 가로질러 가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한 것이었다. 길도 없는 산골짜기를 가로지르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와도 같았지만 산의 무서움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나는 대책 없이 걷기 시작했다.


산속에서 해가 지는 것이 도시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오후 4시가 넘어가자 이미 주변은 어두워졌고 5시가 가까워지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급격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해가 지자 설상가상 엄청난 추위가 덮쳐 왔다. 6월 말의 초여름 날씨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싸늘한 산속의 공기는 민소매와 핫팬츠 차림의 나를 극한의 추위로 몰고 갔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쪽 다리에 근육경련까지 와서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거의 삶을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해도 첩첩산중에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그저 마음 속으로 '누구 없어요? 저 좀 구해주세요.' 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어떻게든 그 위기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오래전 어떤 사이클 선수가 경기 도중 찾아온 근육 경련을 이겨내기 위해 송곳처럼 뾰족한 물건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완주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가방에서 맥가이버 칼을 꺼내 들고 비장한 심정으로 허벅지를 향해 냅다, 찌르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상처를 내기 전에 한 번만 더 해보자는 생각에 통나무처럼 굳어버린 허벅지와 장딴지를 미친 듯이 때리고 주물렀다. 10분 넘게 그 짓을 했더니 조금씩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하늘이 주신 마지막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 또다시 몸상태가 변할지 모르니 무조건 하산하는 게 최선이란 생각에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한 시간쯤 사투를 벌였을까, 저 멀리 마을의 불빛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불빛들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아,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이 세상 모든 신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다.


어설프게 아는 것은 아예 모르는 것보다도 못하다는 말이 있다.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때의 경험은 그 이후 나를 많이 변화시켰다. 간혹 등산을 가게 되면 에너지바나 초콜릿 같은 가벼운 간식거리와 생수를 꼭 챙기고 가급적이면 케이블카가 있는 산만 찾아다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00% 확신이 없을 때엔 절대 앞장 서거나 내 주장을 강력히 말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생사의 기로에 서서 산을 헤매고 다녔던 그날, 그 산 어디엔가 분명 저승사자가 왔으리라 생각한다. 만약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라도 했더라면 아마 저 쪽 어디에선가 나를 향해 손짓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르....웬, 아....르....웬,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고 나와 함께 떠나자꾸나."



<실종, 그 뒷이야기>

무사히 하산에 성공한 나는 마을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저녁 8시가 다 되어 고사리 분교로 향했다. 도착 후 후배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자면 구조대(?)를 꾸려서 찾으러 가야 한다는 의견과 그냥 기다려보자는 의견이 정확히 양분된 상태라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중이라 했다.

상대적으로 나와 학교 생활을 오래 한 후배들 대다수는 당장 찾으러 가야 한다는 의견이었음에 비해 철없는 신입생들과 93학번 후배들은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냐며 자기들끼리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고 했다.

바다처럼 마음이 넓은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그 해 2학기부터 93학번과 94학번을 싸잡아 놓고 괴롭혔다. 싸가지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