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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Nov 10. 2022

나 이제 곧 두 눈을 감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길

글쓰기 모임 '보글보글'의 11월 둘째 주 주제어인 '생전 유언장'을 소재로 한 가상의 글이니
읽으시는 분들 모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O서방, 자네에게 무거운 짐을 맡기고 떠나려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네. 이 글을 누구에게 남길까 오래전부터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자네에게 남기는 게 제일 나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네. 생전에 내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전생의 인연이 모녀지간이었을 거라 하셨을 만큼 자네 장모를 딸처럼 생각하셨다는 말 들은 적 있을 걸세. 나 또한 아들 없이 평생을 살다가 자네를 처음 만난 이후부터 늘 아들처럼 생각했다네.


떠나는 마당에 뭐 그리 할 말이 많냐고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몇 가지만 당부하고자 하네. 이미 웬만한 것은 성격이 깔끔한 내가 다 정리를 했으니 크게 어려운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한 사람의 인생을 마감하고 정리하는 게 어디 간단한 일인가. 그 책임을 자네에게 오롯이 넘기려니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드네. 내가 남에게 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거 잘 알지 않나. 어쨌든 잘 부탁하네.


우선 자네 장모 말일세. 자네도 어느 정도 알겠지만 자네 장모는 사람의 정(情)을 많이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네. 어린 시절부터 객지 생활을 오래 한 탓에 제대로 그런 걸 느끼고 받을 틈이 없었지. 내가 함께 하는 동안 나름 최선을 다 한다고는 했으나 아마 많이 부족했을 걸세. 부족했던 그 부분을 이제 자네가 좀 채워주게나. 


그렇다고 매일 전화해서 문안인사를 올리라는 얘기는 아니네. 그런 건 시간 날 때마다 한 번씩만 해주면 된다네. 그리고 자네 장모는 커피와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운동하는 셈 치고 휴일에 하루 정도 날 잡아 커피 한 잔과 꽃 몇 송이 정도 들고 깜짝 방문을 해주면 될 걸세. 내가 살아생전에 가끔씩 하던 것들이니 이제 그걸 자네가 좀 해줘야겠어. 자주 할 필요는 없고 평균적으로 2~3개월에 한 번씩만 해줘도 충분하리라 보네.


그리고, 내 딸 쩡이에 대해서도 몇 가지만 부탁하겠네. 내 피를 물려받아서 한 풀 꺾이긴 했지만 걔가 자네 장모를 닮아서 간혹 예상치 못한 히스테리를 부릴 때가 있다는 거 잘 알지? 그럴 때마다 한 번 더 참고, 한 번 더 생각하고, 그래도 안된다면 한 번만 피하도록 하게. 기본 심성은 착한 아이인데 제어장치가 작동이 안 돼서 그러는 거니 잠시만 혼자 있게 두면 알아서 풀릴 걸세.


그 아이, 장사하는 부모를 만나 유년 시절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살았다네. 다른 친구들이 아빠, 엄마 손잡고 나들이며 여행을 할 때 혼자 집에서 TV를 보거나 그림 그리기를 하며 놀았어. 내성적인 성격이기도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던 이유 때문에 친구도 별로 없고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것에 익숙한 아이라네. 그런 결핍에 대한 부분을 자네가 좀 채워줬으면 하네. 가급적이면 가까운 곳이라도 가족여행을 자주 다니게.


이제 내 얘기를 해야겠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나중에 임종이 가까워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나마 정신이 온전할 때 미리 써놓는 것이라네. 자네도 결초보은이라는 사자성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행여 임종 직전에 하는 말들이 이 글과 배치될 때엔 무조건 이 글에 써놓은 대로 따라주길 바라네. 


먼저 장례 문제일세. 예로부터 3일장이 전통과 관례처럼 이어지고는 있으나 최근 들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나는 그게 다 허례허식이란 생각이 강하다네. 가능하다면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고 되도록 빨리 끝내주게. 할 수만 있다면 하루 만에 끝을 내도 좋아. 남들 눈치 보지 말고 내 뜻이 그렇다는 걸 앞세워 소신대로 진행하게. 꼭 하나 바람이 있다면 내가 마지막으로 떠날 때 BGM으로 Gary Moore의 'The Loner'란 곡을 깔아줬으면 하는 거네.


그리고, 제사 같은 건 절대 지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또한 남은 사람들에겐 부담이지 않은가. 기일이 되면 한 번쯤 내 생각을 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네. 아니, 그마저도 굳이 할 필요는 없네.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중요하지 이미 떠난 사람이 뭐 그리 중요하겠나. 예전에 한 번 말했듯 절대 납골당 같은 곳에 날 가둘 생각도 하지 말고. 그 또한 남은 사람들에겐 낭비이자 민폐라는 게 내 생각일세.


마지막으로 유품에 대한 얘기일세. 웬만한 건 내가 틈틈이 정리한 덕분에 크게 처리할 것들은 얼마 없을 거야. 대신 하나만 해주면 된다네. 책상 맨 아래 서랍에 보면 외장하드가 몇 개 있을 걸세. 그 안에는 쩡이와 자네 장모, 그리고 내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네. 날짜별로 정리한 폴더 속에는 그동안 내가 찍어온 사진과 영상이 다 들어 있으니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슬픔의 감정이 무뎌졌을 때쯤 하나씩 열어 보게. 참고로 직박구리 폴더 안 야동 같은 것은 없으니 쓸데없는 수고하지 말고.


또한, 그 안에는 내가 그동안 네이버와 브런치에 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아이디와 비밀번호까지 남겨놓았다네. 내가 죽더라도 절대 카톡이나 문자로 알리지 말고 장례절차를 마무리 짓고 여유가 생길 무렵 네이버의 임시 저장 글 하나와 브런치 작가의 서랍 속에 들어 있는 미발행 글 하나씩만 나 대신 발행해주게. 그 안에는 수십 년째 인연을 이어온 블로그 이웃과 브런치 작가들에게 전하는 내 마지막 인사가 들어 있다네. 


자, 여기까지는 자네와 나만 아는 걸로 하고 아래 두 개의 글은 당사자에게 따로 전해줬으면 좋겠네.


<사랑하는 내 딸 쩡이에게>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2008년 어느 봄날 따뜻한 햇살과 함께 세상에 태어나 실눈 뜨고 나를 바라보는 그 모습이. 너를 어떻게 키울까 걱정이 앞섰던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고맙고 내가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대신 이뤄줘서 고맙고 또 고마웠다.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 헤어짐이 뒤따르는 것이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이치인 것처럼 이제는 너와 헤어질 때가 된 것 같구나. 그동안 아빠로서 많이 부족했음을 잘 알기에 조금 더 살면서 너를 지키고 보살펴야 하는데 더 이상 그럴 수 없음에 마음이 아프단다. 웬만한 일은 O서방에게 부탁을 했으니 알아서 잘할 거다.

단 하나 네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은 O서방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와 비교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O서방은 기본적으로 나와 결이 많이 다른 사람이니 내가 너에게 했던 것을 그대로 해줄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대신 내가 미처 해주지 못했던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O서방이 나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부부간의 불행의 시작은 타인과의 비교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으니 이 점 명심하길 바란다. 아울러 혼자 남을 네 엄마, 당분간은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해라. 그 두 가지만 명심하고 산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이 아빠는 네가 곁에 있어서 너무 행복했단다.

사랑한다. 내 딸


<내게 오직 한 사람 미야에게>
 
이렇게 이름을 불러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당신한테는 고마운 것 이상으로 미안한 감정이 더 커. 나를 만난 이후부터 고생만 시킨 것 같아 미안하고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도 올리지 못해서 남들 다 입는 웨딩드레스조차 입히지 못했던 것도 미안하네. 어떤 사람은 두 번 , 세 번도 입던데 말이야.

 이렇게 힘들게 살 줄 알았더라면 짐 싸들고 내게 왔던 그날 매몰차게 쫓아내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여러 수백 번, 수천 번을 했었어. 그래도 용케 잘 버티고 살아온 것 같아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막상 떠날 생각을 하니 당신이 제일 걱정이네. 

당신이란 사람, 혼자 있으면 한 마리 나무늘보처럼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잖아. 옆에서 잔소리라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고 하는 것도 없이 방바닥에 드러누워 숨만 쉬고 살 것 같아 그게 마음에 걸려.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을 것 같기도 하고. 부탁인데 내가 곁에 없더라도 끼니는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 처녀 시절처럼 과자 부스러기 먹고 살 생각하지 말고.

아, 맞다. 우리 사는 동안 노래방 한 번 못 가봤잖아. 날 더러 음치라서 노래방 기피한다고 했던 말 기억나? 내가 이래 봬도 대학 다닐 때 단대 가요제 나가서 무려 참가상을 딴 사람이라는 거 알랑가 모르겠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부른 노래, 파일로 저장해서 장롱 속 액세서리 상자 안에 넣어놨어.

UN이 부른 '선물'이란 노래인데 결혼식 때 축가로 부르려고 준비했다가 결혼식이 무산되는 바람에 헤어질 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 들려주네. 꼭 라이브로 들려주고 싶었는데 사는 게 뭔지. 그러고 보면 우리 참 열심히 살았던 거 같아. 노래방 한 번 못 가볼 정도로 바쁘게 살았으니. 당신이랑 사는 동안 그 노래 가사를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는 거 그거 하나만 알아줬으면 해.

할 말은 많지만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아. 내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만약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난다면 지금보다는 조금이나마 더 나은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어. 그게 부부 사이이든 그냥 친구 사이이든 상관없이 말이야. 긴 세월 동안 함께 해줘서 너무 고마웠어. 그리고,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란 약속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먼저 떠나서 미안해.

그리고...... 그리고........ 미야 사랑해.
 


<후기>

이런 글은 글의 특성상 원테이크로 쓰는 게 맞다고 봅니다. 고치고 또 고쳐봐야 다 나아질 글이 아님을 잘 알기에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썼습니다. 글의 진행이 자연스럽지 않거나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 점 유의하셨으면 합니다. 아래 영상은 아직 부르지 못한 그 노래 UN의 '선물' 뮤직 비디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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