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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Nov 11. 2022

빼빼로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상전벽해라더니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여름의 더위가 가실 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 빼빼로 데이 행사 발주다. 작년에 얼마를 팔았으니 올해는 무조건 전년 대비 120~150%는 팔아야 한다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본사의 희한한 논리와 계산법에 따라 품목과 수량이 (권장 발주라는 명목 하에) 일방적으로 정해지면 나는 부지런히 그것을 지우기 바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로 인해 본사와의 실랑이는 피할 수 없었다. 하나라도 더 밀어 넣고 최대한 많이 팔아야 한다는 본사 측과 꼭 필요한 만큼만 넣어 적당히 팔고 끝내겠다는 나의 충돌은 매년 이어졌다. "나중에 물건 없다고 저한테 추가 요청하시면 안 됩니다."라는 본사 직원의 협박성 멘트에도 고집스러울 정도로 버티던 게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흔히 이 업계에서 말하길 11월도 31일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여길 정도로 단일 품목 하나만으로 많게는 거의 하루 매출을 넘어설 만큼 폭발적인 판매를 기록하는 게 빼빼로 데이였다. 그런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리겠다고 마음먹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사를 시작하고 처음 얼마 동안은 본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도 잘 들으며 하라는 대로 다 했었다. 11월이 들어서기 무섭게 점포 앞에 커다란 천막을 치고 미리부터 간접 홍보를 하기 시작했고 D-데이를 며칠 앞두고는 본격적으로 조명을 달고 진열하기 시작하며 결전의 그날을 준비했다.


가장 판매가 많이 이루어지는 날인 빼빼로 데이 이브(11월 10일)와 당일에는 따로 인건비를 써가며 카운터를 담당할 직원을 준비하고 아내와 나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 제치는 거리에 서서 '빼빼로 팔이 소녀와 소년'이 되어 시린 손을 후후 불어가며 연신 "빼빼로 보고 가세요~~", "빼빼로 사세요~~"를 외쳤다.


가게 앞을 지나가던 사람이 잠깐이라도 눈길을 주기만 하면 냅다 달라붙어 온갖 아양을 떨기도 했고 시력이 조금 좋지 않아 보이는 남자 고객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면 아내를 앞세워 미인계(?)를 쓰기도 했다. 간혹 가게 앞에 잠시 정차를 하고 창문이 내려지는 기미가 보이면 냅다 운전석 쪽으로 달려가 "어서 옵쇼~ 뭘 드릴까요?"라며 비굴함을 넘어선 처절함으로 어필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조수석에 앉은 여성은 "오빵~ 나 저거!!"라며 콧소리 가득 담은 한마디와 함께 손가락으로 가장 큰 바구니를 골랐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총알보다 빨리 그 바구니를 여성의 품에 고이 안겨 드렸다.


그렇게 몇 번의 왕복으로 순식간에 몇십만 원을 손에 쥐었지만 물건을 파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원가로 따지면 만원이 안될 싸구려 중국산 빈 바구니, 상품 모두 합쳐봤자 2만 원이 채 되지 않을 부실한 구성에 조화 몇 송이 꽂아 놓고 7~10만 원을 호가하는 제품을 팔 때마다 내가 장사꾼인지 사기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OO데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가졌던 게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 역할을 맡았던 배우 정진영 씨가 했던 "그래, 다 미친 기야. 전쟁은 미친놈들이 하는 짓인 기야."라는 대사처럼 모두가 미쳐 날뛰는 것 같았다. 대목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가며 부실한 상품을 팔아 대는 나도 미쳤고, 그런 부실한 물건을 사느라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우습게 쓰는 고객도 미쳤고 그걸 사달라고 떼를 쓰는 일행도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날 결심을 했다. 도저히 양심에 찔려 고객에게 권할 수 없는 상품은 앞으로 절대 들여놓지 않겠다고. 조금 덜 버는 한이 있더라도 손님에게 떳떳하게 추천할 수 있는 상품 위주로 가겠다고. 그리고 나는 이듬해부터 그걸 실행에 옮겼다. 상품 구성이 너무 부족해서 이대로는 거리에 천막 치고 진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본사 직원의 말에 천막 안 치고 안 나가면 그만이라고 했다.


한 번만 더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면 안 되겠냐는 담당 직원의 읍소에 가까운 권유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사실 몇 년 동안 외부 행사를 하며 아내도 나도 많이 지쳤었고 그렇게 해봤자 남는 게 없다는 걸 몸소 체험한 터였다. 겉보기로는 매출이 껑충 뛰긴 했지만 매익률을 따지고 추가로 들어가는 인건비에 직원들 저녁 식사비, 교통비까지 지출을 하고 나면 오히려 적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가 새벽까지 잠을 못 자고 가게에 나와 있어야 하는 게 너무 싫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칭얼대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가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초코 우유 하나와 수면 시간을 맞바꾼 따님 (2013년 사진)

그 후 몇 년 동안 본사와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나는 확고하게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수년 내에 이런 정신 나간 행사는 그 의미가 대폭 축소될 것이고 물건 같지도 않은 물건은 고객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할 거라 내다봤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실용성과 실리를 중시하는 젊은 세대들이 사회 주류로 들어서는 순간 자연스럽게 변화할 거라 생각했다.


내 판단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부터 그걸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크고 화려한 것보다는 내용물이 알찬 중저가 상품 위주로 판매가 이뤄지고 예전처럼 부실하기 짝이 없는 바구니류 상품을 찾는 고객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지극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여전히 현실과는 동떨어진 올드한 마인드 속에 살고 계신 중장년 층들 중에 바구니를 찾는 분이 계시긴 하다. 진열해 놓은 상품이 너무 부실하다며 살 게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리는 그분들께 겉으로는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긴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이고, 아저씨 그런 거 갖다 주시면 돈 쓰고 욕먹어요. 제가 팁 하나 드릴 테니 아래 사진에서 제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제발 무슨 데이에만 생색낼 생각하지 마시고 평소에 좀 잘하세요. 평소에.'


빼빼로 하나에 11만 원을 넣고 양면테이프로 완벽하게 밀봉을 한 후 아내에게 선물한다. 여유가 되는 분은 1,111만 원을 넣어주면 그 효과가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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