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Nov 15. 2022

제발 사람 말 좀 듣고 삽시다

술이 잘못인가 사람이 잘못인가

장사를 하다 보면 육감이란 게 발달한다. 아니, 꼭 장사가 아니더라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자주 접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마치 어떤 위기에 직면했을 때 팔뚝에 털이 곤두서는 스파이더맨처럼 자신의 기억에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초능력(?)을 발휘할 거라 생각한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늦은 새벽 시간, 한눈에 보기에도 만취상태인 50대 남성이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짐과 동시에 몸에 소름이 돋으며 앞으로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뜸 명령조의 반말이 적막한 가게 내부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야!! 대선 30병!!!"


이런 손님들의 특징 중 하나가 별 일 아닌 것에 꼬투리를 잡고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기에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그 제품은 많이 팔리는 제품이 아니라 가진 재고를 다 털어도 20병이 안될 것 같으니 다른 제품과 섞어서 30병을 만들어 드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불만 가득한 말이 한차례 튀어나오긴 했지만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소주 30병을 봉투에 모두 담는 것 자체가 힘들 뿐 아니라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해도 혼자 힘으로는 제대로 들고 가지 못할 게 뻔하기에 봉투 대신 박스에 담아도 괜찮은지, 함께 온 일행은 없는지 한차례 더 고객에게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만사 귀찮다는 듯한 말투로 다짜고짜 욕설과 반말이 돌아왔다.

"씨발, 니 초보가? 뭘 자꾸 씨부리고 있노.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깐 일단 담기나 해라."


불쾌지수, 스트레스 지수가 조금씩 상승했지만 어떻게든 빨리 내보내는 게 상책이라 최대한 튼튼하게 포장과 테이핑을 한 후 동행한 분이나 차량은 없는지 집까지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를 물었다. 택시를 이용한다면 차 트렁크까지 가져다 드릴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그 고객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박스를 노끈으로 묶어 달라며 또다시 떼를 쓰기 시작했다.


소주 30병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우니 그렇게 들고 가는 것은 무리이고 양손으로 박스를 안고 가는 게 최선이라며 수차례 설득했음에도 고집을 꺾지 않은 그 고객은 내 손에 쥐고 있던 테이프를 뺏다시피 한 후 박스를 칭칭 감고는 보란 듯이 박스를 한 손으로 들었다. '뚝'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진 테이프를 들고 있는 고객에게 그게 가능한 일이었다면 진작 해드렸을 거라고 고집 좀 그만 부리시라고 다시 한번 당부했다.


본인 뜻대로 해도 안된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으니 이제는 내 말을 좀 듣겠거니 싶어 끊어진 테이프를 대충 수습해서 출입문까지 들고 나가려는데 이번에는 한사코 본인이 들고 간다고 또다시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시는 분께는 못 맡기겠다며 대신 들어 드리겠다고 말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한 나는 알아서 하시라고 말씀드린 후 하던 일을 계속하기 위해 카운터로 돌아왔다.


사고가 터진 것은 그때였다.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나가던 고객이 한차례 중심을 잃는가 싶더니 소주 30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박스와 함께 출입문 근처에서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와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아주머니는 넘어진 아저씨를 한 번 쳐다보고는 나를 향해 사람이 어찌 그리 매정하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한쪽에서는 박스를 품에 고이 품고 앉은 아저씨가 아파 죽는다고 소리 지르고 다른 쪽에선 아줌마가 나를 불친절의 아이콘 인양 쳐다보며 악을 쓰는데 영락없이 없던 죄를 뒤집어쓴 꼴이었다.


얼른 달려 나가 고객이 괜찮은지 살펴본 후 아주머니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드렸다. 속에서는 천불이 일어났지만 영문도 모르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자초지종을 얘기하는 게 옳다는 판단이었다.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아줌마가 아저씨를 향해 "어이구, 이 인간아. 들어간 지 한참이 돼도 안 나오길래 뭐 하나 싶어 와 봤더니 이 지랄을 하고 있었나?" 라며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아저씨가 만취 상태에서도 소주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악착같이 박스를 품에 품고 넘어져서 박스 모서리 부분만 살짝 찢어진 것 외에는 별 다른 피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보수하고 아주머니께 혹시 차를 갖고 오셨으면 대신 실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다며 제대로 모르고 오해해서 죄송하다고 하셨다.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자신이 들고 가겠노라 고집을 부리는 아저씨는 아주머니에게 몇 대 더 맞은 후 마지못해 박스를 내게 넘겼고 나는 박스를 차 트렁크에 실은 후 고객이 차에 무사히 타도록 부축을 해드리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사람도 물건도 큰 피해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행여 넘어지는 중에 소주병들이 깨지고 거기에 사람이 찔리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을까 싶은 생각에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아찔하기만 하다. 한 번씩 그때처럼 만취상태로 들어와서는 남의 말 듣지 않고 고집부리는 손님을 볼 때마다 그런 궁금증이 든다. 그 상황까지 이르게 된 책임을 묻는다면 과연 어디에 물을 것인가.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술을 마신 사람이 잘못일까 아니면 사람을 그 지경이 되도록 만든 술 자체에 잘못이 있는 걸까? 이도 저도 아니면 술을 만들어낸 인간을 탓해야 하는 것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빼빼로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