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Dec 13. 2022

그날 새벽, 그 남자는 살아남았을까?

부러움과 두려움 사이의 간극

<살짝 19금 글입니다. 미성년자이거나 뿌리 깊은 양반의 후손으로서 점잖을 떠는 분이라면 조용히 백스페이스 바를 누르고 나가시길 권합니다.>


학창 시절 정년퇴직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떤 선생님께서 본인의 경험상 졸업한 남자 제자가 여학교에 혼자 찾아오는 것보다 남자 학교에 여제자가 단신의 몸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오는 것을 훨씬 많이 봤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극히 일부의 예로 100%라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대담할 때가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그럴까 싶었다. '당당한 남자&수줍어하는 여자'라는 고정관념이 머릿속에 박힌 나로서는 수긍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고정관념이 깨진 것은 장사를 하면서부터였다. '수다=여자', '상대적으로 깔끔한 여자'라는 생각은 수많은 손님들을 맞으면서 가볍게 깨지고 말았다. 의외로 남자들이 말이 많고 시끄러운 것을 보며 '수다=여자'라는 고정관념이 깨졌고 시식대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가는 것은 오히려 남자보다 여자들이 훨씬 많은 것을 보며 여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깔끔한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이른 새벽 시간 가게에 들어온 그 커플은 겉으로 보기에 남자는 남성미가 물씬 풍겼고 여자는 여성스러움을 온몸에 휘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다소곳한 모습이었다. 이것저것 먹거리를 고른 그 커플은 카운터에 물건을 올려놓고 한참 동안 비식품 매대 주위를 맴돌며 서성거렸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비식품 매대 앞에서 물건을 찾지 못하는 고객 중 90% 이상은 콘돔을 찾는 것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던 나는 카운터 옆에 따로 진열된 콘돔 전용 진열장을 넌지시 내밀며 혹시 찾고 계신 것이 이거냐고 물었다. 마치 속마음이라도 들킨 것처럼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이 행여 무안해할까 싶어 애써 담담하게 각 상품의 가격대와 요즘 잘 팔리는 상품이 뭔지 몇 가지 상품을 추천했다.


문제가 생긴 것은 그때였다. 과묵하게만 보였던 남자 고객이 뒤늦게 말문이라도 터진 것인지 상품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가격은 얼마고, 특수 기능은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 두께는 얼마인지 폭풍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혼자 왔다면 모를까, 멀쩡히 두 눈 뜨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여자를 생각한다면 최대한 빨리 결정하고 구매했어야 했는데 이 눈치 없는 양반은 알뜰 주부라도 빙의된 것인지 모든 제품들을 꺼내 놓고 비교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는 범위 내에서 설명을 하면서도 뭔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 서 있던 여자가 기다리다 지쳤는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오빠, 그냥 아무 거나 사라. 다 똑같다."

이 때라도 빨리 결정을 내렸으면 좋았겠지만 여자 친구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남자는 어떤 것을 사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인가에 대한 생각뿐인 듯 내게 쉴 새 없이 질문 공세를 펼쳤다.

"사장님, 돌출형은 뭐죠? 이건 사정 지연 약품이 들어있는 건가요? 한 통에 몇 개 들어있죠?"


'아, 제발 그만하고 끝내자. 내가 불안해서 못 살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얼굴은 정면으로 향한 채 가자미 눈이 되어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려 뒤에 서 있는 여자의 동태를 살피려는 짧은 그 순간, 그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핵폭탄 같은 한마디가 조용한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으.므.그.나 스아라캤재?(아무 거나 사라고 했지?) 개수만큼 하지도 못하는 새끼가 뭐 그리 말이 많노?"


순간 가게 안에는 그 여자를 제외한 모든 게 정지된 듯 보였다. 오래전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만화에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세상이 멈추는 그 장면처럼 그 남자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폭탄 같은 말을 퍼부은 여자는 이내 발길을 돌려 잔뜩 화가 난 걸음걸이로 문밖으로 뛰쳐나갔고 약 5초 정도의 정적이 흐른 후 그 남자는 미리 카운터에 올려둔 물건과 함께 결국 가장 비싼 10개짜리 콘돔을 사서 뒤따라 나갔다.


그 후, 그 커플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10개를 다 썼는지, 아니면 끝내 여자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하고 미개봉 상태의 콘돔을 들고 씁쓸하게 집으로 돌아갔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보통, 새벽시간에 콘돔을 사러 온 커플들을 볼 때면 늘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단지 애정이 가득 담긴 레슬링 한 판이 부러운 게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그 시간이 부럽고, 그렇게 불같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젊음이 부러웠다.(나도 시간만 주면 지금 당장이라도....... 으잉?)


하지만 그날만은 예외였다. 그날 나는 콘돔을 판매하면서 난생처음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잔뜩 화가 난 여성들을 수없이 만나봤지만 그 여자의 표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분명 그 여자의 얼굴에는 뭐라도 하나 걸리기만 하면 당장 요절을 낼 것만 같은 '결기'같은 것이 보였다. 과연 그날 새벽 그 남자는 사지육신 멀쩡한 몸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했을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은데.....


요즘도 콘돔을 사러 오는 커플들을 종종 본다. 콘돔을 사러 왔다고 먼저 말을 꺼내는 게 어느 쪽인가 정확한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6:4 정도의 비율로 여자 쪽이 높은 편이다. 그마저도 여자들은 "콘돔 어디 있어요?"를 당당하게 외치는 반면 남자들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주변을 서성이며 쭈뼛쭈뼛 말을 못 하거나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귓속말에 가깝게 "그거... 어디 있어요?"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여자가 오히려 남자보다 대담할 때가 있다는 선생님의 예전 그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적어도 내가 겪어본 바에 따르자면 그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여자는 강하지만 힘을 숨긴 채 아닌 척하는 것이고 어머니는 초능력을 발휘할 정도로 아예 대놓고 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비록 그게 1평도 채 되지 않는 좁은 카운터에서 바라본 극히 일부의 사례를 두고 내린 결론이라는 크나 큰 핸디캡이 있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제발 사람 말 좀 듣고 삽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