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나 안 만났으면 어떻게 살았겠어? 다행인 줄 알아
생일이라고 유난을 떨 나이도 아니고 상다리가 부러지는 잔칫상을 받을 시기도 지났지만 그래도 하루만큼은 남다른 대접을 받아보고 싶은 게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바쁜 일상 탓에 겨우 미역국 한 냄비 끓여 나눠 먹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어느덧 관례처럼 자리 잡은 지 오래이기에 선물 따위는 받을 생각도, 줄 엄두도 못 냈던 게 우리 부부의 현실이었다.
그나마 나 같은 경우, 못난 남편 만나 고생하는 아내를 지켜보는 것이 안쓰러워 아내 생일만큼은 챙기려고 노력하는데 반해 아내는 매년 내 생일마다 특별한 이벤트 없이 조용히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뭐 필요한 거 있냐고 아내가 물을 때마다 이 나이 먹고 새삼스럽게 뭘 챙기고 자시고 그러냐는 대답과 동시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그 즉시 "오케이!! 그럼 받고 싶은 거 없는 걸로."를 외치며 냉정하게 상황 종료를 선언하곤 했다.
연애하던 시절 잠깐을 제외하고는 늘 그렇게 이벤트나 선물에 무심했던 아내가 올해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몇 개월 전부터 틈만 나면 '뭐 필요한 거 없어?' '올해 생일만큼은 원하는 거 하나 사 줄 테니 미리 생각해 놔.'라며 잔잔한 내 마음에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그럴 때마다 자동응답기에 빙의된 나는 "난 당신만 건강하게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라는 전혀 마음에 없는 낯간지러운 멘트만 반복해서 읊어 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설거지를 하다가(강조 강조) 잠깐 고개를 숙이는 순간 음악을 듣기 위해 귀에 꽂은 'White Kongnamul'(대부분 에어팟이라 부름)이 귀에서 빠져 싱크대 위로 떨어진 적이 있다. 작고 편리한 것이 장점이긴 하지만 지성 피부를 갖고 있는 내게는 작은 충격에도 미끄러져 빠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던 터라 늘 조심하곤 했었는데 하필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다행히 물에 빠지는 대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십년감수한 순간이었다.
간단한 집안일을 하긴 하지만 집에서 갖는 유일한 휴식이라 할 수 있는 그 시간에 음악 감상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그날부터 당장 무선 헤드폰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이 쓰는 고가의 상품을 배제하고 무늬만 무선 헤드폰인 저가형 상품도 제외하며 가성비가 뛰어나다는 두 개의 제품으로 압축한 것이 며칠 전, 내심 이번 생일 선물로 사주길 기대하며 두 장의 사진을 아내에게 보냈다.
그러나 아내는 이번에도 역시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둘 중에 하나 사 줄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기대했던 내 바람과는 달리 아내는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물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돈을 좀 더 쓰더라도 사고 싶은 것을 사라는 말을 뒤늦게 하긴 했지만 이미 마음이 차디차게 식어버린 내게 그 말은 버스 떠나고 손을 흔드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었다.
입장을 바꿔 내가 만약 아내로부터 어떤 사진을 받았더라면 나는 그 상품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검색하고 연구하며 여러 대체 상품들과 비교를 한 후 생일날에 맞춰 품에 안겨 주거나 더 나은 제품으로 '서프라이즈~~'를 외쳤겠지만 매사 단순하게 하나만 생각하는 아내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과도한 욕심에 가까운 일이었다.
20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보며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아내는 참 독특한 유형의 사람임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시댁에 갈 때도 뭐가 부족한지 세심하게 살피고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갈 때 가져가거나 급한 경우엔 택배로 보내기도 하고 딸아이 생일 때도 초정밀 타격을 가하는 전투기처럼 그 무렵 딸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정확히 안겨주는 아내가 왜 유독 내겐 이토록 무심한 걸까?
결국 아내는 올해 생일 선물로 나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지갑을 사 줬다. 연애하던 시절 받은 것을 아직도 갖고 다니고 있기에 바꿀 때가 됐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결정한 아내가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정작 내겐 크게 필요치 않은 물건이라 서운한 마음만은 금할 길이 없었다. 몇 년 전에는 들고 다닐 일이 거의 없는 가죽 클러치 백을 선물해서 장롱 속에 처박히게 만들더니 어쩜 그렇게 나와 어울리지 않고 불필요한 물건만 고르는지 그 또한 재주라면 재주인지 모르겠다.
지갑을 손에 받아 들고 있자니 오래전 연애 초기에 아내에게 지갑을 사 준 기억이 났다.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색상에서부터 디자인까지 고민에 고민을 하고 수납공간이 많이 필요한 것을 선호하는 아내를 위해 백화점과 상가를 쉴 새 없이 찾아다닌 끝에 아내에게 꼭 맞는 것을 골라서 선물했을 때 처제로부터 '언니보다 언니를 더 잘 아는 센스 있는 남자'란 소리를 들었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노력은 당연한 게 아니냐는 내 말에 그 집 식구들이 나를 외계인 쳐다보듯 바라보는 눈빛을 보냈을 때, 그때 알았어야 했다. 이 집안사람들은 내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아내와 다투는 일의 대부분은 생각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구체적으로 말을 안 해주는데 어떻게 알 수 있냐는 아내와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듣냐는 나를 볼 때면 다른 부부들과는 많이 다름을 느낀다. 비단, 선물을 주고받을 때가 아니더라도 부부간에는 평소에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그 사람이 뭘 갖고 싶어 하는지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수시로 체크해야 하고 사소한 말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고 기억해 뒀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게 평소 내가 가진 생각인데 그게 그리 큰 욕심이자 무리한 요구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답답한 마음 하소연할 곳이 없을 때마다 새하얀 모니터 앞에서 하염없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다.
'어이, 당신 말이야. 그 정도 눈치를 줬으면 무선 헤드폰 질러줘야 하는 거 아냐? 사람이 어쩜 그럴 수 있어? 나 같으면 절대 그렇게는 안 했겠다. 그리고 말이야. 내 비록 돈 좀 못 벌고, 얼굴 못 생기고, 몸매가 상하 성장형이 아닌 좌우 성장형이고 당신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게 만드는 더러운 직업을 가진 게 흠이긴 하지만 누가 뭐래도 당신은 정말 훌륭한 남편 만났다는 거 이 말만은 꼭 해야겠어. 어딜 가서 이런 섬세한 남자를 만나겠어? '
오늘도 차마 전하지 못한 마음의 소리만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