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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un 23. 2022

커피, 가스 라이팅 그리고 셔틀

커피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사장님은 커피를 진짜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주말 아침 퇴근하는 길에 원두커피 한 잔을 내리는데 옆에 온 알바 녀석이 내게 한 말이다.

"무슨 근거로? 나 커피 별로 안 좋아하는데."

"퇴근하실 때마다 꼭 한 잔씩 뽑아 가시잖아요."

"이거? 내가 마실 거 아냐."

"그럼 설마...... 여사장님 커피 셔틀 하시는 거예요? 어머~ 사장님 너무 로맨틱하신 거 아니에요?"


'로맨틱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이렇게라도 해야 한 끼라도 얻어먹을 수 있고 그날 하루가 조용히 넘어가니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하는 거지. 난들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억누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자타가 공인하는 커피 박사이자 커피 중독자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커피 한 잔을 마셔야 생기가 도는 희귀한 체질을 가진 아내는 커피에 밥 말아먹기도 가능할 것 같은 사람이다. 그에 비해 나는 한마디로 ‘커. 알. 못'이다. 커피다운 커피를 처음 마신 게 대학 입학을 하고도 한참 지난 후에 선배가 사주는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였을 정도로 커피에 대해서는 'No관심+문외한'이었고 지금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났으니 연애 당시 카페를 가는 것은 내게 큰 고역이었다. 어느 정도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배려와 희생'이라는 명분 하에 자신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말을 할 수 없는 게 만난 지 얼마 안 된 커플의 숙명이 아니던가.(설마 나만 그랬던 건 아니겠지??) 


처음 한동안은 카페에 갈 때마다 아내가 시켜주는 대로 마셨다. 영하의 날씨에도 아이스 음료만 마시는 내게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도저히 수행 불가능한 미션이었지만 아무 말 없이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흉내 내며 향을 음미하는 듯한 퍼포먼스를 펼치곤 했다. 성격이 불같은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곧 전투에 돌입하는 것을 의미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집 커피는 향이 참 좋은 거 같아. 오빠도 그렇지?"

"으..... 응, 그... 그.... 그러네." (향은 무슨!!! 사흘 밤낮 삶은 타이어 곰탕 같구만. 도대체 이걸 무슨 맛으로?)

"여기 리필도 된다. 한 잔 더 마실래?"

"그래? 그..... 그..... 그럴까?" (제발~ 플리즈~ 타이어 곰탕을 또 마시라고? 그것도 뜨거운 걸로?)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때쯤 나는 아내에게 모든 걸 실토했다. 사실은 커피에 대해 전혀 모르고 뜨거운 음료는 죽었다 깨도 마시지 못하며 한겨울에도 얼음이 들어간 아이스 음료만 마시는 '얼음 성애자'라는 것을. 그렇다고 해서 이후의 삶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내가 마시는 커피의 온도가 급격히 낮아졌고 컵 안에 얼음이 동동 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곤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아내와 인연을 맺은 지 20년째인 요즘도 아내는 틈만 나면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한 마리 하이에나처럼 카페 탐방을 한다. 시간이 맞지 않아 혼자 가거나 딸아이와 함께 갈 때를 제외하면 늘 동행을 해주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아내는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간 채 목에 깁스를 하고 마치 '네가 커피를 알기나 해? 자고로 커피란 말이지.....'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카페에 들어간다.


언젠가 한 번은 그런 아내의 모습이 눈꼴사나워 카운터 앞에서 호기롭게 '나는 빙수~!!'를 외친 적이 있다. 물론 돌아온 것은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빙수를 왜 먹어? 그냥 늘 먹던 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킨다. 알았지?"라는 청유형을 가장한 명령형 짧은 대답뿐이었다.


또 어느 날엔가는 아이스 타이어 곰탕의 간(?)을 맞추기 위해 시럽이 든 병을 들었다가 졸지에 노인 취급을 당한 적도 있다.

"지금 뭐하는데? 다 늙은 아저씨도 아니고 커피에 시럽을 왜 넣어? 커피는 향으로 마시는 거야. 그냥 마셔."

나는 그저 첫맛이 너무 쓰길래 시럽으로 중화를 시도했을 뿐인데 그걸 두고 다 늙은 아저씨라니 도대체 '시럽=노인'이라는 등식은 언제, 어디서 생겨난 법칙이란 말인가.


 황당한 일은 카페를 나설  벌어졌다. 누구는 석탄 달인 것 같은 물을 사약 마시듯 꾸역꾸역  마셨는데 정작 본인은 입에 대다가 말 나오면서 " 집은 원두를 태웠나? 맛이  쓰더라 그치?"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모습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제가 쓰다고 했잖아요. 커피는 향으로 마시는 거라면서요.'

그날 아내는 나를   죽였다.



다시 돌아온 토요일 아침, 알바 녀석이 퇴근하는 나를 붙잡았다.

"사장님, 오늘은 그냥 가세요? 커피 셔틀 하셔야죠."

"오늘부터 파업이야. 힘들게 갖다 줘도 전혀 고마워하질 않더라고."

"괜찮으시겠어요? 여사장님 성격에 가만 안 있을 거 같은데...."


살짝 걱정이 되긴 했지만 별 일이야 있겠나 싶어 그냥 빈 손으로 집에 가니 아내는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내 커피는?"

"깜빡했다. 미안."

"에헤이~ 이 아저씨가 빠져 가지고 말이야. 얼른 씻고 주방에 가서 커피 한 잔만 타 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방금 들어온 사람에게 커피 요청이라니, 개미 지옥도 아니고 이 놈의 커피 셔틀 미션은 어찌 집에 와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불현듯 모 전직 대통령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기 직전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이러려고... 결혼을 했나...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잠시 회한에 잠긴 그 순간에도 거실에 앉아 있는 아내의 불호령은 끊이지 않는다.

"야!! 이게 커피야, 강물이야? 물이 너무 많잖아. 다시 타서 들고 와."


출산을 제외한 전 분야에서 아내를 압도하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인 나는 왜 커피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인가. 아....... 커피보다 더 쓰디쓴 내 인생이여.




덧붙이는 글)

내 인생 첫 커피는 국민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간 예식장 지하에 있는 다방에서 마신 커피였다. 거의 수직으로 스푼을 내리꽂았다가 퍼 올리는 화려한 스킬에 커피 알갱이, 설탕, 크림의 양이 거의 저울로 잰 듯 똑같은 놀라운 경험을 한 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내 인생 최고의 커피를 만난 것은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오사카 신사이바시 역 지하에 있는 스타벅스 매장에서였다. 나의 유창한(?) 일본어 구사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을 한국인으로 알아본 직원이 커피 홀더에 써준 한국어 인사 덕분에 여행의 마지막 날 마신 그 커피의 맛이 지금까지 최고로 기억된다.

물론 그녀가 예뻤기에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라 우기신다면 절대 부인하진 않겠다.



<메인 사진 : 본인 점포 내 커피머신, 주말을 맞아 아내에게 커피 셔틀을 준비하는 처절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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