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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Dec 27. 2022

눈이 큰 여자? 아니, 통이 큰 여자!!

제가 이런 여자와 살고 있습니다. 에헴~

10월 중순경부터 한 달 동안 딸아이를 고문했다. 가족 단톡방에 내 생일이 며칠 남았는지 매일 공지하며 올해 생일에는 뭘 사줄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괴롭혔다. 감히 사춘기에 도전장을 내민 50대 갱년기의 위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알았으니 제발 좀 그만하라는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늦은 봄이 생일인 딸아이가 그동안 내게 가했던 무차별 공세에 비하자면 애교였고 약과였다. 행여 단톡방을 뛰쳐나갈 기세가 보이기라도 하면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눈앞에서 손가락을 펼쳐 D 데이가 며칠 남았노라고 알려주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비록 엎드려 절 받기에 가까웠지만 신작 영화 관람에 드는 비용을 시원하게 쏘아 주신 따님 덕분에 모처럼 가족 모두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기쁨은 거기까지라는 것을 생각해야 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본 즉 다음날 0시가 되고 날짜가 바뀌자마자 강력한 역공이 시작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 했던가. 강력한 선제공격을 펼쳤다.


"딸, 내년 생일에 애플 워치 사줄게."

"정말? 웬일이래?"

"음.... 그런데 조건이 있어. 내가 가진 주식이 오르면 사줄게."

"하~~~"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인 딸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한숨이 튀어나왔다. 깊은 빡침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탄식이었다.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저번에 아빠 주식 계좌 보는 거 언뜻 봤는데 다 파란색이었잖아. 결국 안 사준다는 얘기랑 뭐가 달라?"

"아니, 그때는 국내주식이었고 지금은 해외....."라고 해명을 하려는 순간 아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 딸아이는 그동안 내게 당했던 울분을 토해내듯 아내에게 모든 것을 폭로하고 말았다.


모든 전쟁은 작은 불씨에서 비롯된다더니 우연히 시작된 딸아이와의 대화가 부부간의 대전(大戰)으로 확전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그동안 겪어온 아내의 성정(性精)으로 보아 최소 전치 10주 이상의 중상이라는 생각과 함께 망나니의 칼을 기다리는 중죄인의 심정으로 고개를 늘어뜨리고 아내의 처분만 기다렸다.


그 순간 아내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밖이었다. 

"야!! 그게 아빠 잘못이야? 푸틴이 전쟁 일으키고, 세계적으로 금리가 인상되고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OO 이모 알지? 그 이모도 지금 마이너스 70%라더라. 지금은 주식하는 사람 누구나 다 힘든 시기야. 올해 초까지는 아빠 잘했어. 아빠가 언제 사고 치는 거 봤어? 믿고 기다려 봐."


아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작년 여름 계좌 개설과 함께 이벤트로 받은 5달러를 들고 시작한 그 종목은 최고 74달러까지 올랐고 무임승차하다시피 올라탔던 나도 무려 다섯 배 가까이 되는 25만 원의 수익을 얻었었다. 70달러를 돌파하는 순간 정점이라는 판단에 미련 없이 다 매도한 나는 3개월 정도 있다가 예수금 2천만 원을 들고 재진입(검은색 동그라미)해서 수익이 500만 원 가까이 되는 지점(녹색 동그라미)에서 일부 익절을 하고 시장을 관망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불행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탈출시점(빨간색 동그라미)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갈등하던 사이 그대로 무너진 시장은 10개월 가까이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지금 마이너스 얼만데?"

"6~70%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금액은?"

"3천만 원을 기준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입니다. 저..... 여보님, 저 이제 이혼당하는 건가요?"

"됐다. 뭘 그 정도로 이혼이고. 네가 그동안 하루도 안 쉬고 일한 게 몇 년인데. 그냥 그동안 야간 알바 쓴 셈 쳐."


아내는 예상보다 더 담대한 여자였다. 돈에 관해서는 나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일절 간여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3천만 원이란 금액이 뉘 집 반려견 이름도 아니고 그렇게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하고 무지할 것만 같던 아내가 비록 단편적인 것이라 해도 주식 시장이 악화된 원인을 알고 있다니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사실,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 뭔가 때 묻지 않은 순수함 같은 게 느껴졌었다. 주식으로 치자면 미래에는 크게 성장할 거라는 저평가 우량주 같은 가능성이 보였었다. 남은 인생을 모두 건 도박에서 죽자 사자 매달리던 아내를 매몰차게 걷어차지 못했던 것 또한 오로지 그 가능성 하나 때문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아내가 반등하기만을 기대하며 믿고 기다린 그 시간이 결코 편하지만은 않았고 그렇게 살아온 인고(忍苦)의 세월이 18년이었다.


올해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온갖 고난을 다 겪다 보니 아내를 만나고 살아온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숱한 위기를 겪으며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 순간에도 나는 아내를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주식시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조급함이 앞서 판단력이 흐려졌다. 조금은 느긋하게 마음먹고 기다렸어야 할 4~5월에 따라잡기에 급급했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가을과 겨울로 이어졌다. 결국 부부관계가 그렇듯 주식 또한 책에서나 볼 법한 기술의 문제가 아닌 심리의 영역에서 바라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 믿을 수는 없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자면 내년 전망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올해 들어 갑자기 반등의 조짐이 보였던 아내가 연말 들어 수직상승세를 보여주며 나를 놀라게 한 것처럼 내년에는 내가 가진 주식도 반등의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될 것이고 꼭 그래야만 한다. 그것만이 통이 큰 그녀의 믿음에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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