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Dec 01. 2022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전에 꼭....

월드컵 직관을 해야겠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대회였다. 비록 2무 1패라는 성적으로 조별 리그를 탈락하긴 했지만 폭염 속에서도 막판 투혼을 보여준 독일전을 포함하여 결과적으로 축구 강국과 대등한 경기를 펼쳤고 당시 감독이었던 김호 감독의 다양한 세트 피스 전술을 보며 우리나라도 준비만 잘하면 더 이상 변방의 약체 취급을 당하지만은 않으리라는 희망을 가졌었다.


복학을 한 후 처음 치른 중간고사 마지막 날 오전, 하나 남은 전공시험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당시 아지트처럼 이용했던 한 후배의 자취방에 모인 나와 후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음날 새벽에 있을 스페인전에 대비하여 낮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으잉? 무슨 이런 기적의 논리가??) 이미 부모님께 일방적으로 외박을 통보했던 터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인근 당구장에 가서 당구를 치고 그러다가 술이 깨면 다시 마시는 역대급 에너자이저 체력을 자랑하던 우리는 이윽고 경기 시간이 되자 14인치 소형 TV가 있는 자취방으로 향했다.


마치 마약 소굴을 연상케 하는 자욱한 담배 연기와 무더운 여름 날씨에 금세 따뜻해진 캔맥주를 벗 삼아 열띤 응원을 한 덕분인지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기적처럼 두 골을 따라붙어 무승부를 기록한 스페인전은 지금껏 내가 온전하게 라이브로 본 유일한 월드컵 경기였다. 2차전 볼리비아전은 보다가 지겨워서 중도 포기했고 3차전 독일전은 전반에만 내리 3골을 먹는 것을 보고 대표팀이 떡실신되도록 두들겨 맞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1994 미국 월드컵 1차전이 내 인생의 마지막 라이브 관전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1998년에는 수험생 신분이라 눈치가 보여 볼 수 없었고 그 뒤 모든 대회는 직업적 특수성으로 인해 보지 못했다. 축구 혐오자를 제외하고 햇수로 28년, 7개의 대회가 대륙을 돌아가며 개최되는 동안 실시간으로 우리나라 경기를 단 한 차례도 못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 어려운 걸 내가 해내고 말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넓은 술집에서, 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광장의 대형 화면을 통해, 그것도 아니면 일찌감치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응원을 하는 것은 내게 사치와도 같았고 언제나 무대 아래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스태프처럼 20년 넘게 그들의 편의를 위해 술과 먹거리를 제공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중 백미는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2002 한일 월드컵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경기시간이 내 근무시간외의 일이었지만 당시 한 점포의 점장 생활을 하던 때라 일하는 애들이 고생하는 것을 외면하기 어려워 자원해서 추가 근무를 했었다. 폭풍 전야와도 같던 경기 중인 시간이 지나고 경기 종료와 함께 승리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손님을 받고 나면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지만 흥분이 최고조에 이른 사람들은 그런 내 상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앞에서 "대~~한민국!!"을 외치거나 하고 싶지도 않은 하이 파이브를 강요하고 심지어는 카운터로 난입해서 나를 끌어안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야 이 정신 나간 놈들아. 지금 내가 그런 거 할 기분도, 몸 상태도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미 영혼이 절반 이상 나간 사람들을 향해 그런 말이 통할 리도 없으니 마지못해 호응을 해줄 뿐이었다. 그게 끝일 줄 알았다.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였고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거둔 예외적인 경우라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4년마다 열린 대회마다 거리 응원은 계속되었고 나는 그때마다 가족과 떨어져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했었다. 내게 월드컵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일명 '라이더'로 불리는 배달 노동자들이 한국 경기가 있는 날만큼은 배달을 거부하겠다는 발표를 했었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고 얼마나 많은 라이더들이 거기에 동참했는지,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실제로 배달 대란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지만 그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배달 노동자들을 한 목소리로 비난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딸배 새끼들'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그들을 향해 배부른 투정을 하는 사람 취급을 하는 악성 댓글들이 줄을 잇는 현실이 너무 서글펐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식에는 신호위반과 끼어들기, 과속, 난폭운전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일부 배달 노동자들의 행태가 깔려 있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행태와 그분들의 결정은 별개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시간 동안 벌 수 있는 수입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축구를 보며 우리 대표팀을 응원하겠다는데 그 정도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지, 그게 그렇게 분노를 표출할 만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지만 남들이 누리고 있을 때 함께 누리지 못하고 서포트를 해야 하는 그 심정은 생각보다 비참하게 다가온다. 나처럼 산전수전 다 겪으며 거의 포기 단계에 이른 사람이 아니라 그런 업종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경력이 짧은 사람일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하다.


이번 대회도 나는 가게에서 일하며 관심 있는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보거나 결과만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가게에서 인터넷 중계를 통해 우리나라 경기를 일부만이라도 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는 않다. 축구와는 담을 쌓고 사는 손님들이 1시간에 서너 명만 와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또 이번 대회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다음 대회는 캐나다, 멕시코, 미국이 공동 개최하는 북중미 대회이고 그다음 2030년 대회는 월드컵 100주년이 되는 해라 축구 종주국인 잉글랜드 또는 첫 대회 개최지인 우루과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다만 다음 대회부터는 참가국 숫자가 48개국으로 늘어나는 만큼 지금처럼 32개국이 출전하는 상황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지기에 단일 국가만으로는 개최가 어렵다고 볼 때 영국(스코틀랜드, 웨일스, 잉글랜드, 북아일랜드)이나 우루과이를 포함한 인접 남미 국가들의 공동개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대회의 개최지 결정은 2024년 FIFA 총회에서 결정된다고 하니 그 결과를 지켜보고 결정해야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2030년 대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기장에 가서 직관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가올 2030년에는 환갑을 한 해 앞둔 나이가 되니 미리 환갑잔치하는 셈 치고 그동안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모아 누려볼 생각이다. 앞으로 8년이란 시간, 설마 그때까지 손님들 시중들며 바코드나 찍고 있지는 않으리라 굳게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국, 귀마개를 사고 말았네그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