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Nov 24. 2022

만남도 헤어짐도 아픔이었지

그때는 어렸나 봐요

현재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90년대 중후반 정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대부분의 남자들, 특히 대학생의 경우 1학년(길게 잡아서 2학년까지) 때엔 학점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미친 듯이 놀다가 군대에 다녀와 복학한 이후에는 잠시 버려두었던 정신을 수습해서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에 매진하는 지극히 단순한 과정을 밟아 가곤 했다.


대세를 거스를 만큼 대범하지 못했던 나도 당연히 그런 테크트리를 탔다. 늦은 가을 제대한 다음날부터 당장 TOEFL 특강을 수강하고 학생도 아니면서 매일 아침마다 학교 도서관을 가는 등 태어나 처음 제대로 된 공부란 것을 하며 이듬해 봄에 복학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던 제대일 이후부터 세웠던 계획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기에 모든 게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만 같았다.


해가 바뀌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었다. 방학 때도 쉬지 않고 나가던 학교였지만 3월의 캠퍼스는 또 다른 싱그러움을 전해주었다. 후배 J와 친해진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볼 품 없이 자그마한 체구에 어디 내세울 정도로 뛰어난 미모도 아니었던 그녀가 마음에 든 것은 똑 부러지는 성격 하나였다. 똑똑한 여성이 이상형이었던 내게 어딜 가서도 할 말 다하는 J는 그 조건에 꼭 맞는 여자였다.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가까워진 우리는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도 하고 강의가 비는 시간이 맞을 때면 같이 밥도 먹는 등 여느 커플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 '이거 마시면 사귀는 거다.', '우리 오늘부터 1일' 같은 낯 뜨거운 표현만 없었을 뿐 누가 보더라도 사귀는 게 분명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잠시 이별을 할 때까지 4개월이란 짧은 시간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방학의 시작과 함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와 아버지 일을 돕기 위해 시골에 있는 집으로 내려간 그녀는 잠시 안녕을 고했다. 불길한 기운이 드리워진 것이 그때부터였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했던가. 지금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딱히 연락할 방법이 없는 무방비 상태로 3개월 가까운 시간을 보낸 후 2학기 개강과 함께 만난 그녀는 몇 개월 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애써 나를 피한다는 느낌을 받던 10월의 어느 날 그녀는 부모님께서 대학원 진학을 했으면 한다며 공부를 해야 하니 지금 당장은 남자를 만날 여유가 없다는 말을 끝으로 내게 이별 아닌 이별을 통보했다. 매달리기도 해보고 협박도 해보며 갖은 수를 다 써봤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누군가의 앞길을 막으면서까지 연애를 하는 게 옳은 일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던 나는 결국 그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영원한 이별을 고한 것이 아니었기에 조금 떨어져 있다 보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모든 면에서 순수하고 서툴러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내가 그녀의 말이 거짓임을 알았던 것은 그녀를 보내고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 집으로 가는 길에서였다. 만취 상태로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온 그녀는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며 술자리로 나를 이끌었다. 그 자리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양아치(도저히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음) 같은 수컷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 남자를 가리키며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토록 모질게 나를 밀어냈구나.'


그녀가 누구를 만나고 사랑하든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으나 그런 양아치보다도 못한 놈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실연의 아픔이 아니라 치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날부터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낮에는 당구장에서, 밤에는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삶에 대한 의욕 자체가 없으니 만사 귀찮아졌고 기말고사도 치는 둥 마는 둥 하며 폐인이 되어 갔다.


함께 재수 생활을 해서 그 남자의 면면을 잘 알고 있던 많은 후배들이 J에게 제정신이 아니라며 말렸지만 한 번 눈이 돌아간 사람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전해 들을수록 내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를 만났던가 하는 비참함에 방황의 깊이는 더 깊어갔다. 긴 인생의 한 단면으로 보자면 극히 사소한 문제였지만 그게 전부라 생각했던 그 당시의 나는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며 긴 시간을 수렁에 빠져 살았다.


그 후 3년이란 시간 동안 시험 준비에 매진하던 내게 J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새천년의 시작을 며칠 남기지 않은 1999년의 겨울이었다.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와 함께 한 번쯤 만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마음이 복잡했지만 피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못 이기는 척 나갔다. 서로의 근황에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맥주 한 잔을 들이켜고 내게 말했다.

"만약에요..... 만약에..... 예전에 떠났던 사람이 돌아온다면..... 선배는 그 사람.... 받아줄 수 있어요?"


긴 침묵이 흘렀다. 머릿속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여러 생각들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에 연애는 사치라는 생각과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어렵게 말 꺼낸 사람을 배려해서 최대한 상처받지 않도록 완곡하게 거절하는 게 맞다는 생각까지 수많은 생각이 뒤엉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글쎄, 눈앞에서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목을 비틀어 죽여버려야지."

오래전 서러움이 폭발해서 그랬던 것인지 미처 걸러내지 못한 말이 한참의 침묵 끝에 내 입을 통해서 나왔다. 그걸로 그녀와의 만남은 끝이었다. 아마 그 당시 내가 번듯한 직장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면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돌고 돌아 다시 오겠다는 사람을 받아들이기엔 내 마음이 너무 좁았던 탓이 더 컸던 것 같다. 


21세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J는 입시학원을 운영한다는 남자와 선을 보고 그 해 5월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아마도 맞선 자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나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차마 예식장까지 갈 수 없었던 나는 지인을 통해 짧은 축하인사만 보냈다. 그렇게 J와의 질긴 인연의 끝을 맺었다.


그녀를 만나고 내겐 두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첫 번째 헤어짐에서 한 번, 그리고 마지막 만남에서 한 번. 첫 번째 헤어짐에서 나는 수렁에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고 마지막 만남에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의 터닝 포인트에서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긴 하다.


길고 긴 시간이 흐르고 작년 이 맘 때 우리 사이의 모든 일을 아는 후배 M이 연락을 해왔다. 

"선배, 혹시 아직도 J에 대한 감정 예전 그대로인 건 아니죠? J가 선배 한 번 보고 싶다는데 어떡할래요? 시간 내서 우리가 거기로 가면 되는데."

나는 J를 만나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묻어야 할 것인가.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짧게 덧붙이는 글>

"그래도 지금 두 여자와 행복하시잖아요? 그럼 됐죠."라는 댓글은 정중히 사양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자면 그녀는 지금 건물주가 되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 만남에서 비굴하더라도 그녀를 받아들였어야 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2002년,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명언을 남긴 히딩크 감독과는 달리 나는 여전히 배가 아프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전에 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