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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Feb 03. 2023

개학을 기다리는 아빠가 몇이나 될까

저 같은 분 계시면 댓글 좀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은 방학을 기다리고 엄마는 개학을 기다린다는 불변의 진리 같은 말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보나 법적으로 보나 엄연한 아빠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년 여름과 겨울 두 번에 걸쳐 오매불망 딸아이의 개학만 기다리는 남자다. 햇수로 8년째에 접어들며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씩 속에서 불덩이 같은 게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런 감정은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어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았을 때가 대부분이다. 


13시간이라는 고된 야간 업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정확히 점심때가 되는데 해가 중천에 뜨고도 남을 시각까지 이불속에 푹 파묻혀 있는 딸아이를 향해 애써 화를 누그러뜨리며 살아 있긴 한 거냐고 몇 번에 걸쳐 물으면 마지못해 이불 밖으로 팔 하나를 쭉 내민다. 웃으면 안 되는데 그 꼴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용광로 속에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I'll be back'을 외치던 아놀드 형님(터미네이터 2의 명장면)이 생각나 헛웃음이 날 정도다.


수차례 실랑이 끝에 딸아이가 겨우 잠자리에서 벗어나 투덜거리는 것을 볼 때면 본전 생각이 절로 난다. 그 옛날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출근하시는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인사를 드리고 퇴근 시간이 되면 동네 어귀까지 나가서 이제나 저제나 아버지께서 오실까 기다리다가 저 멀리 퇴근하는 아버지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냉큼 달려가 가방을 받아 들고 집으로 오던 나였다.


온몸이 애교로 뭉쳐진 나와는 달리 시크하고 무덤덤한 아내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딸아이에게 그런 아름다운 장면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가끔은 '아바마마, 이 엄동설한 추운 날씨에 밤새워 고강도의 노동을 하시느라 얼마나 고생 많으셨습니까? 잠시 몸부터 좀 녹이신 후 얼른 씻으시지요. 소녀, 목욕물 받아 놓고 곧 상을 차리도록 하겠사옵니다.'라는 헛된 상상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렇듯 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고양이 세수마저도 가볍게 건너뛰는 딸아이는 잠깐의 수고를 동반한 공간 이동 후 잠자리에서와 똑같은 자세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하염없이 휴대폰만 바라보며 강렬한 눈빛으로 최대한 빨리 점심상을 차릴 것을 강요한다.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하려거든 어서 내 입에 밥을 떠먹이란 말이다.


그때부터는 마음이 급해진다.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주방으로 향해 밥을 퍼고 아내가 그전날 만들어 놓은 음식을 그릇에 옮겨 담고, 국이나 찌개를 데워 상을 차리기까지 그 모든 것을 5분 이내에 끝내야 한다. 그나마 이렇게 해서 비교적 평화롭게 한 끼를 마무리하면 다행인데 중학교 입학 후 활동범위가 넓어짐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맛을 알아버린 지금은 툭하면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이라 웬만한 요리로는 감당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라탕, 연어스시, 부대찌개, 닭발, 불고기, 갈비 등 먹고 싶은 음식이 딸아이 입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니 아비가 백종원인 줄 아느냐'며 강공 드라이브를 걸기도 하고 오늘만 감사히 먹어주면 다음에는 기필코 맛집을 찾아내서 배달 음식을 시켜주겠노라 회유책을 펼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곤 한다. 


초등학교 다닐 땐 주면 주는 대로 날름 잘 받아먹어서 그 모습을 보고 피곤함도 잊었는데 어째 해가 갈수록 점점 힘이 드는 것인지 왜 방학만 되면 엄마들이 극심한 스트레스가 쌓이는가 몸소 체험하고 있다. 단순 비교는 힘들겠지만 아마도 주부 입장에서 그 강도만 놓고 보자면 명절증후군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 방학증후군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애써 차려놓은 것을 먹자마자 어려운 미션이라도 완수한 듯 뒤도 안 돌아보고 당당하게 제 방으로 돌아가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겨우 맘 편히 수저를 든다. 급격히 밀려오는 피곤함 속에 어디로 밥이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대충 쑤셔 넣고는 잠시 쉴 틈도 없이 설거지를 하고 밀린 빨래를 해놓으면 고단한 하루 일과가 끝난다.


언젠가 아내와 대화 끝에 "당신은 방학 때마다 이 꼴 저 꼴 안 봐서 참 좋겠어."라는 말을 꺼냈다가 "야!! 나도 일하거든. 나는 밖에서 맘 편히 놀고 있는 줄 알아? 원래 애 키우는 게 다 그런 거지. 지 새끼 지가 안 돌보면 누가 돌보겠어?"라는 무지막지한 역공을 당한 적이 있다. 대화 내용만 놓고 보면 누가 아내이고 누가 남편인지......


만약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현재 방학한 자녀와 함께 있는 전업주부를 아내로 둔 남편이 있다면 꼭 하나만 알아줬으면 한다. 당신이 출근한 사이 집에서는 소규모 국지전으로 끝나느냐 대전(大戰)으로 확대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매일매일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그로 인해 아내들은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가고 있을 거라는 것 말이다. 그러니 퇴근 후에는 옆길로 새지 말고 조용히 집에 들어가서 아내가 미처 못한 일들을 대신해주길 바란다. 게임하지 말고, 건담 조립하지 말고, TV 리모컨과 친하게 지내지도 말고.





<덧붙이는 글>

확률은 희박하지만 나처럼 살고 있는, 그리고 나보다 더 치열하게 살고 계시는 Househusband 님들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말씀드리고 싶다. 가까이 계시면 만나서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하며 마누라와 처가를 한데 묶어 까고, 열심히 수다 떨고 싶지만 내가 낯가림이 좀 심하다 보니 그건 좀 힘들 것 같고. 

어쨌든 앞으로 남은 한 달 잘 버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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