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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Feb 13. 2023

읽고 쓰고 생각한다는 것

한쪽에 치우치기보다는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니 글을 읽고 상처입을 지도 모를 분들의 일독(一讀)을 금합니다. 분량도 꽤 길어질 것 같습니다.


흔히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방법으로 삼다(三多), 즉 다독(多讀)과 다작(多作)과 다상량(多商量) 세 가지를 꼽는다. 중국 송나라 시대 구양수 할아버지가 글을 잘 쓰는 방법으로 했다고 전해지는 말인데 누군가는 이를 두고 단순히 글을 잘 쓰는 방법만이 아니라 학문을 대하는 자세라 보기도 하고 특히 그 셋 중 하나인 다상량에 대해서는 글을 쓰기 전에 미리 생각을 깊이 하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글을 다 쓴 후 퇴고의 과정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을 만큼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어차피 이 논란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구양수 할아버지 단 한 사람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원문을 옮겨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으로 판단을 유보할 생각이다.

爲文有三多 看多 做多 商量多 (위문유삼다 간다 주다 상량다)
글을 위한 세 가지 많음이 있다. 많이 보고 많이 짓고 많이 헤아리고 헤아린다.


어쨌든 논란이 되는 다상량을 제외한 다독(多讀)과 다작(多作)에 대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라 해석하는 데에 큰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여 일단 그 두 가지를 중심으로 내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먼저 다독(多讀)이다.

미리 말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나도 찬성하는 편이다. 다만 책 읽기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반대한다. 자신이 쓰는 글에 단순히 인용할 목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문장을 수집하는 독서, '나는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고 있습니다.'라며 과시용으로 하는 독서,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읽는 독서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몇 년 전, 에세이를 제법 잘 쓰시던 어느 작가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희한한 책 한 권을 들고 나타나 글쓰기와 병행해 앞으로는 마음의 양식도 쌓겠다는 포부를 밝히신 적이 있었다. 나름 친분이 있었던 분이기에 왜 갑자기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물어봤더니 본인이 활동하는 독서모임에서 추천한 책이라는 답이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기상조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섣불리 조언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저 침묵만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은 자신에게 왜 댓글을 달지 않는지, 본인이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조언이란 게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에겐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잘 알았지만 몇 번의 간곡한 부탁을 이기지 못해 내가 생각한 바를 그대로 전달했다.

'굳이 새로운 도전을 하기보다는 기존의 글을 다듬는 쪽에 중점을 두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꽤 고심을 하고 상처가 되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장문의 메일을 작성해서 보냈는데 그 일을 끝으로 그 작가님과의 인연은 끊기고 말았다. 흔히 말하는 답정너처럼 '잘하고 있다, 잘할 수 있다'는 답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수는 없었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후 그분께선 리뷰라고 하기에 민망한 수준의 형편없는 독후감을 몇 편 올리다가 거짓말처럼 퇴보의 길을 걸었다. 물론 그분이 단순히 어려운 책 몇 권을 읽고 그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게 시발점이 되어 이후로도 스스로 만든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점점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서라고 하면 유명 작가의 작품,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널리 알려진 책들에만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과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결이 맞아떨어지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앞서 언급했던 그분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수백 권의 책을 읽은들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차라리 그보다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과 소재가 비슷하고 읽기에 부담 없는 적당한 수준의 책 몇 권을 더 읽는 게 낫지 않을까?


두 번째 다작(多作)에 대한 생각이다.

다작의 대명사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매일 글쓰기'이다. 글감이 넘쳐서, 또는 글을 쓸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쓰는 '매일 글쓰기'라면 누가 말릴까? 문제는 자신과의 약속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억지로 쓰는 '매일 글쓰기'이다.


오래전 모 주간지에서 100일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거기에 참가한 적이 있다. 기사를 읽고 매일 그 기사에 대한 느낌이나 소감을 쓰는 프로젝트였는데 참가비 만 원을 내고 참가했다가 100일 후 미션을 완수한 사람들에게는 그 돈을 다시 되돌려주거나 특정 단체에 기부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e-book 단행본 한 권을 증정하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참가자가 500명 가까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100일 뒤에 미션을 제대로 수행한 사람은 겨우 40%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저조했다. 그마저도 단 한 줄의 글을 쓰거나 심지어는 '굿', '성공', '완료' 따위의 한 두 음절만 쓰고도 성공 도장을 받은 사람까지 모두 포함되었으니 실제 임무 완수자는 아마 20%도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주제가 주어지고 분량도 자유인 그런 매일 글쓰기도 그토록 어려운 형편인데 하물며 일반적인 매일 글쓰기는 더 말해 뭘 할까. 그만큼 어려운 게 '매일 글쓰기'란 뜻이다.


가끔 보면 매일 글쓰기를 한다는 분들 중에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분들을 자주 본다.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까지 왜 그렇게 '매일 글쓰기', 정확하게 말하면 '매일 글 올리기'(또는 발행하기)에 목숨을 거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거 전형적인 남들에게 보여주기 용도가 아닌가 말이다.


언젠가 어느 의사 선생님께서 금연에 대한 스트레스로 없는 병을 만들 바에야 그냥 맘 편히 담배를 태우는 게 훨씬 낫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그게 의학적으로 얼마나 증명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편으로는 일리 있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들이 한다고 해서 무리하게 금연에 도전했다가 스스로도 힘들어하고 주변까지 불편하게 하는 금연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매일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글만 써도 될 일인데 그걸 굳이 출근부에 도장 찍듯 사람들에게 공개해야 진정한 '매일 글쓰기'로 공인되는 것은 아니다. 매일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스스로에게 떳떳할 정도로만 그 약속을 지키면 된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예 글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긴 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어느 작가님께선 읽고 생각하는 데 각각 40%, 쓰기에 20%의 비중을 둔다고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보다는 조금 더 세부적으로 나눠서 읽는 것에 10%, 읽은 책을 두고 생각하는 것에 40%, 쓰는 것에 10%, 쓴 글을 다시 읽으며 생각하고 다듬는 것에 40% 정도의 비중을 두는 편이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기에 그 작가님의 방식이나 내가 쓰는 방식이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 없고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도 없다. 다만, 그 비율이 어떻게 나눠지든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하게 나눠지고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 좋은 글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글을 쓸 생각은 않고 무분별하게 많이 읽는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글을 쓰기만 한다고 해서 자신의 글이 기대처럼 성장하고 발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 없이 글을 쓰는 것은 열린 입이라고 함부로 떠드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 입성 2주년을 맞아 글쓰기에 관한 제 생각을 써 봤습니다. 다음부터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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