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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r 09. 2021

가진 것 없는 이의 서러움

그래요, 그 정도 돈은 없습니다만

가끔 TV 토크쇼를 보면 연예인들이 데뷔 전 고생했던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갔을 때 수중에 돈이 몇 만 원밖에 없었고 친구 집에 얹혀살며 고생 고생한 끝에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는 그런 성공담들을 볼 때마다 당연히 어느 정도의 과장이 들어 있거나 꾸며낸 이야기라 생각했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짐을 정리하며 막상 그 입장이 되어 보니 그들의 스토리가 그저 거짓이나 과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배낭 속에는 이불 대용으로 쓸 침낭과 갈아입을 몇 벌의 옷이 들어 있었고 절대 밥은 굶지 말라며 어머니께서 사주신 작은 전기밥솥 하나, 지갑 속에 들어있는 만 원짜리 몇 장의 현금, 이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소박함을 넘어 단출하기만 한 짐을 바라보니 괜히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생면부지의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떨어진 기분은 몇 개의 단어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들 만큼 복잡했다.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났다는 홀가분함과 동시에 여기서 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재부팅된 컴퓨터처럼 기존의 데이터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 현실에서 낯선 이들과의 만남 또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새로 모실 사장님 내외는 꽤 괜찮은 분처럼 보였다. 정착하기까지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사는 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물어보실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얼마 간의 적응 기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점포 운영을 맡았다. 지역 최대 매출을 올리는 곳이란 명성에 맞게 내가 맡은 이후로도 매출의 성장세는 멈추지 않았다.


장밋빛 부푼 꿈을 안고 살았다. 구두 계약이긴 해도 처음 계약을 맺을 때 본인들은 본사와의 계약기간이 끝나는 대로 유능한 직원에게 넘기고 그만 둘 거라 말씀하셨고 틈날 때마다 내게 적금은 잘 넣고 있는지 확인하시며 꾸준히 관심을 주셨기에 언젠가는 나도 어엿한 사장님이 될 거란 희망을 가졌다. 내가 할 일이라곤 그날이 올 때까지 한 눈 팔지 않고 최대한 돈을 많이 모으는 것뿐이었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흐를 것만 같던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일을 한 지 3년째 되던 어느 봄날이었다. 건물주였던 사장님 내외가 1억이라는 거액의 권리금을 제시한 경쟁업체의 적극적인 공세에 남은 계약기간을 포기하고 갑자기 점포를 경쟁업체로 넘기면서부터였다. 


몸담고 있는 구단이 하루아침에 해체되어 무적 신세가 된 운동선수처럼 갈 곳을 잃게 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정에 호소하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따져 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본사에서도 매일같이 직원을 보내 설득을 했지만 이미 돌아선 그분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돈 앞에서 약해지는 게 인간이라지만 직접 그 상황을 겪으니 이제까지 믿고 따랐던 모든 순간들이 물거품처럼 느껴졌고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영하고 있는 두 점포 중 하나는 경쟁업체에 넘기더라도 나머지 하나는 나와 함께 일하던 직원이 돈을 모아 인수하면 안 되냐고 제안했다. 그동안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해주리라 믿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싸늘하기만 했다.


인수할 돈은 있냐며 묻는 사모님의 말에서 돈 없는 사람에 대한 무시와 멸시 같은 게 느껴졌다. 대출이라도 받겠다는 내 대답에 대출은 아무나 해주는 줄 아느냐는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다 맞는 말이었고 당장 내가 몇 천만 원이나 되는 보증금을 구할 방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없이 사는 서러움만은 겪지 않았는데 난생처음 돈 없는 사람의 비참함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나마 일말의 양심이 있었던지 사모님께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신규 점포에서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런 호의 따위 필요 없다고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빈 손으로 돌아가기엔 부모님 뵐 면목이 없어 비굴함을 무릅쓰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일하게 된 곳은 기존에 일하던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출이 부진한 점포였다. 다른 직업을 가진 사장님이 부업 삼아 하는 곳이긴 했지만 직원들 월급 맞추기도 빠듯할 만큼 운영난을 겪는 곳이었다. 특히 비수기에는 본사로부터 받는 정산금보다 인건비가 더 나갈 정도였기에 일하는 내내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가장 많은 월급을 받는 내가 해고 1순위가 될 것은 분명해 보였다.


고심 끝에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그만두겠다는 뜻을 먼저 전했다. 그동안 안면을 익혀온 본사 직원들에게 혹시 최저보증금만으로 인수할 수 있는 점포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즈음 만나기 시작한 지금의 아내와 차근차근 준비를 시작했다. 미처 준비가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었기에 더 이상 미룰 수만은 없었다.


더 버틴다고 갑자기 주변 상황이 나아지리란 보장도 없으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었다. 최소 1~2년 정도의 준비기간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자 첫 번째 사장님 내외의 성급한 결정이 야속하기만 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자면 그분들은 본사와 지루한 소송전 끝에 나머지 한 점포도 손을 떼는 선에서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소식을 들으니 허탈했다.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내가 제안한 방안을 토대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권리금으로 받은 돈의 대부분을 소송 비용으로 썼다는 얘기까지 들으니 꼭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나를 내쫓았어야 했는지 묻고 싶었다. 


나는 그 경험을 바탕 삼아 적어도 돈에 관해서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고 구두 계약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가를 깨달았다. 비록 그분들과의 인연은 끝이 좋지 않았지만 나는 그분들을 통해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면 어떻게 변하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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