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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Feb 15. 2021

단 한 번 실패했을 뿐인데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터닝 포인트

실패의 쓴 맛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승승장구, 성공 가도 같은 표현을 쓸 만큼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무난하게 살아온 내게 난생처음 겪은 실패의 충격은 상당했다. 고등학교 입시와 대학입시를 포함해 크고 작은 시험에서 늘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기에 당연히 그런 흐름이 이어질 거라 믿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취업 걱정은 할 필요 없다는 학과 선배들의 말만 믿고 무사 태평하게 산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찾아온 IMF 사태의 여파로 지역 금융권과 기업들이 연쇄 부도를 맞고 대부분의 기업들이 채용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상황에서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공무원 시험 열풍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시기에 도전장을 던진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 모르겠다. 부모님께선 내 결정에 내심 반가워하시며 막내아들이 당신들의 꿈을 대신 이뤄줄 거라 굳게 믿으셨다.


시작은 괜찮은 편이었다. 학원을 다닌 지 두 달만에 치른 첫 시험에서 거의 합격권에 근접한 성적을 얻은 것이었다. 전 과목을 모두 마무리하지 못한 채 경험 삼아 친 것을 감안하자면 엄청난 성과였다. 성적을 확인한 순간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자만의 영역까지 이르러 어느 정도만 준비하면 합격은 당연한 것이고 수석 합격이냐 아니냐의 문제만 남았다는 환상 속에 빠져 들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이 이미 정부종합청사에 가 있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수험생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취미 생활하듯 여유 있을 때만 책을 들었고 조금이라도 막히는 느낌이 들면 그 즉시 책을 덮어 버렸다. 그렇게 해도 신기할 정도로 모의고사 점수가 잘 나왔기에 이제까지 그랬듯 모든 일이 쉽게 풀릴 거라 생각했다. 


그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두 번째 치른 시험에서 1교시 문제지를 받아 들었을 때였다. 그 해 공무원 시험에는 대학 졸업생들과 대졸 예정자들이 대거 몰려 경쟁률이 급격히 높아졌기에 어느 정도 난이도 조정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으나 막상 눈앞에 펼쳐진 문제들은 이전 시험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모든 게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한 내 책임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결과는 예상보다 더 참혹했다.


지난해와 비교해 반토막 난 성적표를 받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결과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방심하다가 한 대 맞은 거라 생각하고 다시 준비를 했다. 높아진 난이도를 고려해 직급을 낮춰 7급과 9급까지 범위를 넓혔고 일정이 중복되지 않는 선에서 지방직과 국가직 가릴 것 없이 응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과적으로 이 또한 잘못된 판단이었다. 기회가 많으니 뭐라도 하나 얻어걸릴 거라는 안이함이 자리 잡았고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연이은 시험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상적인 수험 생활이 힘들어졌다는 점이었다.


상반기에 치러진 몇 차례 시험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수많은 기회를 놓친 나는 가을에 있는 서울시 공무원 시험과 지방직 9급 시험, 남은 두 번의 시험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각오로 철저히 준비했기에 내심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 기대는 보기 좋게 깨져 버렸다. 


먼저 치러진 서울시 시험은 아예 응시조차 하지 못했다. 전날 내린 폭우로 인해 경부선 철도가 유실되어 열차 운행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정해진 시간까지 고사장에 도착하지 못해 허무하게 기회를 날려버렸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새벽 첫 차를 이용했던 게 문제였다. 마지막 시험에선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뻔히 아는 문제를 실수로 틀리는 바람에 커트라인에 1점도 안 되는 차이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연이은 탈락 소식은 나를 패배주의라는 수렁에 빠지게 했다. 부모님께선 1년만이라도 더 하길 원하셨지만 더 이상 교재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낮에는 국가에서 비용을 전액 지원하는 전산학원에 다니고 밤에는 집 인근에 있는 편의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나이 서른이 되어서까지 부모님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앞으로 뭘 하든 내 힘으로 일어서고 싶었다.


그렇게 우연히 발을 들인 편의점에서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을 줄은 몰랐다. 처음 마음먹기로는 몇 달 정도 일하며 모은 돈으로 상황에 따라 시험에 재도전하거나 수강하는 학원과 연계된 회사에 취업할 생각이었다. 장사란 것은 돈 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 생각했기에 아예 그쪽으로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다.


그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일하던 편의점 사장님의 진심이 담긴 권유 때문이었다. 실패를 거듭하며 나락에 빠지긴 했지만 공무원 시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내 사정을 아는 사장님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그때까지 자신이 데리고 있었던 직원 모두를 통틀어 봐도 장사에 대한 재능만큼은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여력만 된다면 곁에 두고 제대로 가르쳐서 다른 점포를 맡기고 싶지만 그럴 만한 처지가 못된다며 아쉬워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경영주 해외연수를 다녀오신 사장님께서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함께 연수를 다녀온 타 지역의 경영주 중에 두 개의 점포를 운영하시는 분이 계신데 그중 하나를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비록 객지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시급을 받아가며 생활하는 것보다는 정해진 월급을 받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는 사장님의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다.


부모님 두 분을 두고 집을 떠난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시급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급여에 앞으로 살 집의 보증금까지 지원하겠다는 말에 결단을 내렸다. 단순 셈법이긴 했지만 1년 정도만 돈을 모으면 뭐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길게 잡아도 몇 년이면 내가 원하는 것에 도전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심각한 오판이었다. 그 길을 20년 넘게 걷고 있을 줄은 그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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