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Nov 03. 2021

아내가 내게 말했다 "나를 따르라"

오직 한 길만 보는 아내와 거미줄처럼 생각이 복잡한 남편

"그냥 아무 거나 사고 말아라. 옆에서 보는 사람 피 말라죽는 꼴 보고 싶나? 가격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제일 잘 팔리는 거 사면 되잖아. 뭐 살 때마다 왜 그래? 당신, 결정 장애야?"

얼마 전 낡은 노트북을 버리고 새로 장만할 때의 일이다. 1주일 넘게 결정을 못하고 끙끙 앓다시피 하는 나를 보고 참다못한 아내가 폭발한 것이다.

"아니,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어떻게든 가격은 최대한 낮추고 그중에서 더 나은 성능을 찾다 보니 그러는 거지.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돈이 남아돌면 이런 짓 하라고 해도 안 하겠네."


온라인 쇼핑을 할 때마다 벌어지는 이런 흔한 광경, 여느 부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리 부부는 남편과 아내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부부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보통의 경우 아내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이것저것 다 따지고 살피며 쉽게 결정을 못하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 흔한 모습 아닐까?


나는 무슨 일이든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다 하는 편이다. 실패할 확률이 1%라도 존재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정도로 신중하다 못해 답답한 성격이다. 대신 어느 정도 방향이 정해지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고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변수들까지 준비 과정 중에 생각해두기에 웬만한 장애물이 생겨도 즉시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해나간다.


이에 반해 아내는 뭔가 목표를 정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오직 그 목표 하나만 보고 달리는 스타일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가끔씩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부딪히거나 변수가 발생하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거나 바로 포기를 한다. 나와 극과 극인 이런 유형의 아내와 함께 살다 보니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의견 충돌이 잦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내의 판단이 옳았다

오래전 연애하던 시절 아내가 느닷없이 부모님께 휴대폰을 사 드리자고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칠순이 넘은 노인네들에게 무슨 휴대폰이냐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꺼내지도 말라고 해도 아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 보세요. 우리 부모님은 내가 잘 알아요. 아직 잘 모르시나 본데 특히 어머니 같은 경우는 그런 거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거든. 내 전화기 살 때도 노발대발하신 분이야. 왜 돈 쓰고 욕먹을 짓을 해?"

"언제 한 번 말씀이라도 드려 봤어? 왜 해보지도 않고 미리 결론부터 내려? 그건 그때 일이고.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분명 지금쯤은 갖고 싶으실 거야."


오랜 입씨름 끝에 결국 아내의 뜻대로 일단 말씀이라도 꺼내보는 걸로 합의를 봤다. 해보나 마나 나의 100% 완승이란 자신감 속에 의기양양하게 전화를 드렸는데 어머니의 첫마디를 듣고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내가 참 어이가 없어서...... 아 글쎄 막내 며느님 되실 분께서 두 분께 휴대폰을 장만해드리고 싶다는데요? 당연히 안 하실 거지요?"라는 내 물음에 어머니께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하셨다.

"그래? 이쁜 거 사주나?"

어라? 이게 아닌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다 늙어 죽어가는 노인한테 휴대폰이 뭔 소용이냐고 말씀하셨던 분이 무슨 바람이 불어 마음이 바뀌셨나 싶었다.


전화를 끊고 상황은 역전이 되어 순식간에 중죄인이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아내는 보란 듯이 큰소리를 뻥뻥 쳤다. "거봐, 어머님이나 아버님 두 분 다 친구분들 만나실 때 눈치도 보이고 그러셨을 거야. 아들이란 사람이 그 정도도 못 헤아려?"


이후에도 우리 부부는 한차례 더 휴대폰 대전을 치렀다. 급격히 높아지는 스마트폰 보급률에 맞춰 아내는 부모님도 스마트폰으로 바꿔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제대로 쓰지도 못할 팔순 노인네에게는 불필요한 물건이라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부모님께서도 반대 의견을 내비치셨고 두 형님 내외도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나 썩 내키지 않아 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13명의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아내만이 충분히 쓰실 수 있고 필요한 기능들은 하나씩 배워나가면 된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부모님께서는 큰 문제없이 스마트폰을 쓰고 계신다. 처음 한동안은 의지와 무관한 영상통화가 걸려오기도 하고 화면을 잘못 터치해서 엉뚱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도 하셨지만 지금은 저장된 노래들을 들으시기도 하고 필요할 땐 카메라를 켜서 사진을 찍기도 하신다. 문자를 능숙하게 보내진 못하시지만 받은 문자를 확인하는 방법은 아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아내의 생각이 맞았던 거다. 


직진 스타일의 여자와 함께 산다는 것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겉으로 보기에 잘 포장이 되어 드러나지 않을 뿐 모두가 결점이나 단점이 있다. 나는 모험이나 도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방과 충돌할 가능성이 보이면 애써 피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으며 기회를 엿본다. 권투로 치자면 아웃 복서 스타일에 가깝다. 이와 달리 아내는 전형적인 인파이터 스타일이다. 


상반되는 두 가지 유형의 성격 중 어느 것이 낫다 못하다를 따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불장군식으로 무슨 일을 진행하다가 뜻대로 진행이 되지 않을 때 일일이 수습을 해야 할 때면 나처럼 신중한 성격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다가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 일을 그르칠 때면 아내처럼 '못 먹어도 Go!!' 스타일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극과 극을 달리는 이런 상반된 성격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게 최선의 부부생활이다. 


함께 한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내는 여전히 직진 중이다. 상의 한마디 없이 독단으로 일을 진행하다가 난관에 부딪히는 경우도 많고 그때마다 나는 뒷수습을 하느라 가진 에너지를 다 소비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휴대폰 대전'처럼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과 함께 살았더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해서 좋은 결과물을 얻을 때가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래서 부부관계는 서로 대체재가 되기보다는 상호 보완재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부모님 휴대폰 바꿀 때가 되어가는데 다가올 '휴대폰 3차 대전' 때문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혹시 두 분 모두 폴더블 폰으로 바꿔 드리자고 하지는 않을까? 아내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인데.

"해봤어요?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문득 개그 콘서트 <달인>이라는 코너에서 개그맨 김병만이 했던 그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두 눈 부릅뜨고 사자후를 내뱉는 아내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도대체 어떤 년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