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미니멀 라이프
무료한 주말 오후, 늘 하던 대로 휴대폰에 저장된 음악을 듣는다. 랜덤으로 재생을 설정해 놓으면 잊고 있었던 곡들을 우연찮게 들을 수 있어 좋다. 익숙한 피아노 전주와 함께 시작된 노래 'Endless love'. 라이오넬 리치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미롭고 다이애나 로스는 호소력 짙은 음색을 들려준다. 이 노래 제목처럼 우리 부부도 끝없는 사랑을 나누면 좋겠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말 그대로 끝없는 전쟁, 'Endless war'인 셈이다.
"당신 말이야. 나 같은 남자 안 만났으면 지금쯤 쓰레기장에서 살고 있을 거야. 예전에 TV에서 봤지? 온 집안이 쓰레기로 뒤덮여 있는 집. 입구부터 거실, 방안까지 빼곡히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집 말이야."
"이 아저씨가 진짜.... 말 같은 소릴 좀 해."
언제나 그렇듯 대화는 거기에서 멈췄다. 뭔가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든가 과거의 일들을 끄집어내는 순간 그건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는 선전포고가 되고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아무런 이득도 없이 서로에게 상처만 안긴 채 어설프게 봉합하듯 마무리됨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아내는 기본적으로 뭘 버릴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와는 달리 나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들면 값비싼 물건이든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물건이든 눈에 띄는 대로 갖다 버리는 성격이다. 이건 알뜰함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적어도 내 기준에선 공간만 차지하고 먼지만 쌓이는 것은 버리는 게 맞다는 생각인데 아내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놔두고 있으면 언젠가는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다.
게다가 나는 눈에 거슬리는 건 바로바로 치워야 하는데 비해 아내는 하나둘 모아놨다가 한계점에 이르러서야 한꺼번에 처리를 하는 스타일이다. 내가 치우고 정리를 하겠다고 해도 아내는 늘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그냥 좀 냅둬라. 내가 나중에 알아서 치울게.”
이런 상반된 성격이기에 충돌은 수시로 발생한다. 모르는 분들은 그렇게라도 치우면 다행이라고 그걸 왜 못 기다려주느냐고 반문하시겠지만 문제는 우리 집이 그다지 넓지 않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작은 집에 불필요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걸 지켜보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고역이다. 버럭 소리를 질러 보기도 하고 좋은 말로 달래보기도 했지만 사람 천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20여 년 가까이 아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부끄럽기까지 한 이런 가정사는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말한들 내 말을 믿어줄 사람 아무도 없음을 잘 알기에 나는 항상 벙어리 가슴 앓듯 끙끙 앓기만 했다. 실제로 외모만 놓고 보자면 아내는 똑 부러지고 깔끔하게 정리를 잘할 것처럼 생겼음에 비해 나는 돼지우리에 집어넣어도 오히려 돼지가 못 버티고 뛰쳐나갈 정도로 더럽게 살 것만 같은 비주얼을 갖고 있으니 그 누가 있어 내 말을 믿어주겠냔 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속이 썩어 들어갈 무렵 모 군부대에서 상담사로 일하는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우리 부부의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그 친구는 이 기회에 두 사람 함께 상담을 한 번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비싼 프로그램이지만 특별히 무료로 해주겠다는 선심성 발언이 왠지 미덥지 못했으나 그렇지 않아도 너무 잦은 충돌에 힘들었던 나는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친구는 그날 바로 몇 장의 설문지를 메일로 보내줬다. 그걸 출력해서 시험 보듯이 꼼꼼하게 답을 체크하라는 주문과 함께 절대 커닝(?)을 하거나 서로 상의를 해서 답을 오염시키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정답이 없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하되 최대한 성실하게 답을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결과는 그다음 날 바로 나왔다. 궁금해서 묻는 내게 친구는 웃음부터 터뜨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이 달라도 너무 다른데 그 와중에 희한하게도 공통점이랑 접점이 있어.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어제 말했던 그거 말이야. 혹시 와이프가 부모님 사랑을 못 받고 자랐다든가 그런 거 있어? 내가 보기엔 뭔가 결핍에서 오는 집착 비슷한 그런 거 아닐까 싶어서."
친구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산골 오지에서 태어나 교육 문제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언니와 객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 그래서 부모님과의 추억이 그리 많지 않다고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심각한 수준은 아닌데 네가 지금보다 더 잘해야 될 것 같아. 잘해줘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친구와의 통화는 끝을 맺었다.
아내가 아픈 것일 수도 있다니. 심각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 말 자체가 주는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날부터 마구잡이식으로 버리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다. 대신 아내가 영역 표시하듯 여기저기 던져둔 것들을 한 곳으로 모아 정리를 해뒀다. 언젠가는 치우리라는 믿음을 갖고. 그에 따라 우리 집은 점점 좁아져 갔지만 이 문제로 인한 아내와 나의 충돌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제까지 살면서 아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학창 시절은 어땠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아내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아닌데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강했었다. 시시콜콜 얘기를 다 하는 입이 가벼운 성격도 한몫하겠지만 자신이 말을 하고 싶을 때 스스로 꺼내는 것이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생각을 조금씩 바꿔야 할 것 같다. 아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아내의 과거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역시 부부생활이란 게 쉽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적어도 내겐 남북통일보다 더 어려운 게 부부생활이다. 그래도 미니멀 라이프 잠시 보류하고 같이 사는 사람 이해할 기회를 얻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