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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Oct 10. 2021

도대체 어떤 년이야?

아내의 머릿속에는 성능 좋은 지우개가 있다 ep 02

서현철 씨 그 심정 내가 잘 알지

몇 년 전 '라디오스타'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화려한 입담으로 화제가 된 서현철이라는 배우가 있다. 준비해 온 에피소드 대부분이 MC와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가져다줄 만큼 재미가 있던 게스트였는데 그중 내 눈길을 끈 것은 아내와 살면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다양한 일화였다. 


방송을 보는 내내 어쩜 그리 내가 겪는 일들과 똑같은지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만나 뵙고 서로의 고충(?)에 대해 무한 수다라도 떨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크게 공감을 했던 부분은 아래 사진에 나오는 그 말이었다. 


"자기는 웃고 말지만 나는 상처 받았잖아요."


사진 출처 : 유튜브 MBC 공식 종합 채널 엠뚜루마뚜루 캡처
사진 출처 : 유튜브 MBC 공식 종합 채널 엠뚜루마뚜루 캡처




이거 왜 이래? 나는 당신이 첫사랑이라고

코로나 19 사태에 대해선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오래전 여름의 일이다. 케이블카 한 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노래를 불러대는 딸아이의 청에 못 이기는 척 통영에 간 적이 있다. 이왕 케이블카를 타려면 풍경이 괜찮은 바다와 함께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오랜만에 하는 나들이니 만큼 통영의 명물인 오미사 꿀빵도 사고 충무김밥도 원 없이 먹어 보고 괜찮은 가격이면 간 김에 미역이나 김 등 해산물도 사 오겠다는 나름의 계산까지 고려한 통영행이었다.


통영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오랜만의 나들이에 우린 모두 들떠 있었고 막힘없는 고속도로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을 했기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주차장에 도착할 무렵 상황은 180도 변해버렸다. 주차장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정체가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 도로 한복판에서 정차 상태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휴일임을 감안하더라도 수많은 사람과 차량의 행렬이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끝없이 이어진 대기 차량들로 인해 도로는 이미 초대형 주차장이 되어 있었고 인도는 인도대로 끊임없는 사람들의 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내와 나는 업무를 분담하기로 했다. 아내는 차에서 내려 걸어서 표를 예매하러 가고 나는 주차공간을 찾아 돌고 돌고 또 도는 뺑뺑이를 감행했다. 약 1시간 정도의 고생 끝에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으나 뙤약볕에서 줄을 선 아내도, 주차공간을 찾아 이리저리 눈알을 굴린 나도 이미 파김치가 되었다. 


"탑승 시간까지 1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데 가까운 식당에라도 가는 게 낫지 않겠어?"

나의 제안에 아내도 딸도 흔쾌히 동의를 했다. 메뉴고 뭐고 가릴 처지도 아니고 해서 눈에 띄는 아무 식당에 들어가 에어컨 앞에 앉으니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원한 물을 한 잔 들이켬과 동시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

"통영에 당신 친구 있잖아. 온 김에 전화라도 한 번 해보지? 시간 괜찮으면 나중에 가는 길에 그쪽으로 가서 커피 한 잔 정도 하는 것도 괜찮고....."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온 아내의 대답은 기가 막힐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이야~~ 또 어떤 년이고? 통영에 내 친구가 어디 있다고. 말해봐라. 내가 다 용서해 줄게. 도대체 통영 그녀는 누고? 여자관계 복잡했을 거란 상상은 했지만 통영에까지 발을 담그고 있을 줄은 몰랐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너무도 단호하고 당당한 아내의 태도에 나는 순간 내가 착각을 했나 싶을 정도였다.


'아닌데..... 분명 통영에 친구가 있다 그랬었는데.....' 싶어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해 초쯤 생굴 한 박스를 보내준 것이 기억나서 지난번에 굴 보낸 친구가 통영이라 하지 않았냐고 말을 하니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 맞네 혜진이(가명)가 통영에 있었구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우와~~ 내가 진짜 여자관계가 복잡했으면 꼼짝없이 뒤집어쓸 뻔했네.


"니는 우째 니 친구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노?  그리고 말이야. 어쩜 그렇게 1초도 생각하지 않고 즉각적인 반응이 나올 수가 있어?"

억울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한마디 했더니 혼자서 박장대소를 하며 김해에서 이사 간 지 얼마 안 돼서 착각을 했다고,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단다. 배우 서현철 씨처럼 아내는 웃고 나는 상처 받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 VS 웬만한 건 잊고 사는 여자

모태 솔로의 인생을 30년 넘게 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한 것이 있다. 앞으로 내가 만날 여자가 누가 되든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에 대해 절대 화를 내거나 억지로 고치려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길고 긴 연애 기간 동안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에 거의 매일 다투고 사소한 충돌을 하긴 했지만 결혼 후 새롭게 발생하는 것들에 비하자면 그것들은 극히 일부였다.


마르지 않는 샘물에서 물이 솟아 나오듯 끊임없이 나타나기 시작한 (적어도 내 기준에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행동들에 나는 조금씩 내상을 입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솔로 시절 했던 다짐은 점점 희미해져 갔고 어느새 나는 아내를 향한 잔소리꾼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아내 입장에선 그 모든 것들이 부부 사이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인데 내가 과민반응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아내는 건망증이 좀 심한 편이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거의 나노 극세사 급으로 사소한 것까지 잘 기억하는 편이다. 이 문제를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이 그르다는 시각으로 접근하고 싶진 않다. 분명 장단점이 있는 부분이니까. 아내는 버럭 화를 내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뒤끝이 거의 없다. 반면, 나는 그런 거 하나하나를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한 번씩 화병이 날 때가 있다.



어느 날 아내가 외출을 한 사이 딸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빠, 엄마는 왜 그래?"

"엄마가 왜?"

"아니,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잖아."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억지로 참으며 대답을 했다.

"그래도 네 엄마는 그걸로 끝이지. 기억력에 좀 문제가 있어서 자기가 화낸 것도 바로 잊어버리잖아. 그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그리고 평소에 말 좀 잘 들어. 그럼 아무 문제없잖아."


딸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든 이후 아내와 충돌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중간에 끼어 있는 나로서는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 애를 쓰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난 딸아이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지 않더라도 억울한 부분이 꽤 많을 것이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딸아이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딸, 넌 절대 못 믿겠지만 지금의 네 엄마 장족의 발전을 한 거야. 내가 지금까지 네 엄마랑 같이 살면서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각고의 노력 끝에 그나마 사람 비슷하게 만들어놔서 저 정도지 내가 처음 만날 때 모습이었으면 넌 지금쯤 정신병 걸렸어. 그러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예전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심했거든.'


나는 아내에게 큰 걸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어디 가서 말실수를 하지나 말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고 잊을만하면 불쑥 튀어나오는 건망증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런 내 마음 아내는 알고는 있으려나 모르겠다.

내가 늘 아내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워~~ 이런 나의 마음을.' 

오늘 퇴근길에는 오랜만에 가수 안치환 씨의 '내가 만일' 이란 노래를 들으며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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